"고객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서가을이요.""서가은 고객님이요?""아니요.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때 그 가을이요."고객센터에 전화를 할 때 자주 겪는 상황이다. 자기소개를 할 때도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난다. 어느 순간 자기소개를 이렇게 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사계절에 있는 서가을입니다."사람들은 '가을'이란 이름을 가진 나를 부러워한다. 흔치 않기 때문에 이름만큼은 잘 기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흔치 않은 이름, 특히나 '가을'이란 이름으로 사는 것은 그렇게 부러운 건 아니다.
이름만 가을일 뿐인데...다들 내가 가을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이 '가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여름에 태어났다. 이런 질문도 받아보았다.
"가을아, 요즘 온난화 때문에 봄과 가을이 사라져가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니?"듣고 나서 머릿속에 물음표 세 개가 그려졌다. 그래서 내가 "심각하죠"라고 답을 내놓으면
"너는 이름이 가을인데 구체적으로 생각해야지"라고 혼났다.
단지 이름이 '가을'일 뿐인데, 사람들은 내가 가을(계절)의 전문가라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가을에 태어나지 않았다고 했을 때도, 가을이 사라진다는 것에 대해 구체적인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도 사람들은 이상하게 실망한 눈치다. 마치 답.정.너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답만 해)인 것처럼 내가 그들에게 할 답변은 정해져 있는 것 같다.
대부분 농담으로 하는 소리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21년 동안 지겹도록 듣는 이야기라 이제는 제일 듣기 싫은 질문으로 등극했다. 그리고 이 질문 때문에 나는 가을(계절)이 싫어졌다.
이제는 다른 레퍼토리로친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다들 내 이름으로 한번씩 날 놀리고 싶어 한다.
"가을아, 지금은 가을도 아닌데 어떻게 왔니?""가을아, 이제 너의 계절이 왔어.""서가을? 서어톰(autumn)이네"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나를 놀리는 방법이다. 너무 오랫동안 듣다보니 지겨워 놀리려는 친구에게 "나를 놀리고 싶거든 다른 소재를 갖고 와"라고 말했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냈다.
가수 이문세의 노래 중에 <가을이 오면>이 있다. 친구는 내 앞에서 그 노래를 주구장창 불러댔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한테도 전파를 시켰다. 그래서 나는 여러 애들이 부르는 것을 들어야만 했다. 덕분에 나는 그 명곡이 들릴 때마다 정말 끔찍하다.
내 지인들 중에 서로 모르는 사이인 경우가 많다. 신기하게도 그 사람들이 서로 친한 것처럼 똑같은 소재를 사용한다. 그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제는 놀리고 싶으면 다른 레퍼토리로 놀려!"그럼에도 나는 내 이름이 좋다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보면 '차라리 개명을 하지' 생각이 들 수 있다. 나도 진심으로 개명을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내 이름이 좋은 이유, 지금까지 '서가을'로 살아 온 이유가 있다.
우선, '가을(계절)'이 주는 따뜻한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이 첫 인상을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나는 사람에게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첫 인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첫 인상'처럼 바뀌기 힘든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처음 본 사람에게 낯을 가려 친절하게는 대하지만 살갑지 못한다. 그런데 이름 덕분에 어쩌면 '차가운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는 첫인상이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가장 큰 이유는 내 이름을 대체할 만한 이름이 없는 거다. 이름이 흔한 이름이 아니다보니 처음 만난 사람도 '서가을' 하나만큼은 잘 기억한다. 공연 보는 걸 좋아하는데, 응원하는 배우가 내 이름을 기억했을 때 정말 이름 덕을 본다고 느낀다.
또, 한글 이름이다보니 한문 이름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편리함도 있다. 초등학생 때 한문을 익히라는 이유로 '한문이름 00번 써오기' 숙제를 많이 받았다. 그때 나만 혼자 좋아했다. 다른 애들은 익숙하지 않은 한문을 그리다시피 주어진 양을 써야 했다. 그래서 다들 울상이었다. '서가을'만 반복하면 되는 나 혼자 '룰루랄라'였다. 마지막으로 내 이름이 가진 뜻이 너무 좋다.
'가을만큼 따뜻한 사람이 되어라.'이렇게 편리함, 좋은 뜻을 담고 있는 이름을 대체할 이름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리고 개명하기엔 아직까지 '서가을' 내 이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