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이 장식에 불과했던 폭압의 시대, 그 시대에 긴급조치는 어쩌면 당연한 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최소한의 형식적인 절차와 기본적인 영장조차 그 시절 권력자들에게는 매우 거추장스럽고 번거로웠을 테니까. 무거운 공기가 세상을 억누르던 그 시절 수많은 필부와 대학 초년생 등이 말 한마디, 술주정 한 번으로 수 년 간 영어의 몸이 되었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기도 싫은 악몽과 같은 풍경이다. 그런데 국민의 기본적 인권보장을 사명으로 하는 사법부는 당시 침묵을 넘어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라는 등의 판결을 통해 박정희 정권에 편승하고 부역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다.
시대가 변했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긴급조치를 위헌이라 판단했고, 법원은 재심 무죄 판결과 국가배상청구를 인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2013년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일련의 과거사 관련 퇴행적인 판결들이 선고되기 시작했다. 국민의 상식으로도, 법리적 관점에서도 수긍하기 어려운 판결들이 희한한 법논리와 함께 아무렇지도 않게 양산되었다. 대부분은 국가의 재정을 걱정하는 소위 '국고주의'의 입장에서 국가배상청구를 제한하거나 봉쇄하는 판결들이었다.
대표적으로, 양승태 대법원은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보고서와 같은 유력한 증거조차 국가배상청구의 증거로 쉽게 인정하기 어렵고 과거사 관련 국가배상 소송의 소멸시효를 3년으로 제한하여 국가에게 면죄부를 주었고(대법원 2013. 5. 16. 선고 2012다202819 전원합의체 판결), 과거사 피해자라도 생활지원금 등 보상금을 조금이라도 받았다면 국가배상을 받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대법원 2015. 1. 22. 선고 2012다204365 전원합의체 판결).
급기야 양승태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는 당초부터 위헌·무효이지만 긴급조치 발령은 불법행위는 아니라는 괴이한 판결까지 선고하였고(대법원 2015. 3. 26. 선고 2012다48824 판결), 용기를 내어 위와 같은 퇴행적 판결과 다른 내용의 판결을 선고한 하급심 판사에게 징계까지 추진하였다.
그런데 최근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의 조사 결과 이와 같은 일련의 과거사 관련 퇴행적 판결들의 배경에 양승태 대법원과 박근혜 정권과의 내밀하고 깊은 협잡이 자리 잡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최근 특별조사단의 조사보고서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한다.
2011. 9. 양승태 대법원장 취임. 이후 상고법원 도입을 역점사업으로 추진.
2013. 2. 박근혜 대통령 취임
2013. 5. ~ 2015. 3. 문제의 과거사 관련 대법원 판결 선고
2015. 7. 27.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기조실장 지시로 서울중앙지법 정○○ 판사가 '현안 관련 말씀자료' 작성. 주요 내용은 사법부가 그동안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 사례로 앞서 언급한 과거사 관련 퇴행적 대법원 판결들을 언급함. 구체적으로 과거 정권의 적폐 해소 즉, 왜곡된 과거사와 관련된 사건의 방향을 바로 정립하였다고 하면서 그 대표적 사례로 위 과거사 판결들을 제시함.
2015. 7. 28. 임종헌의 지시로 시○○ 심의관은 '상고법원 입법추진을 위한 BH 설득방안' 문건 작성. 상고법원 도입을 위한 BH 설득의 구체적 방안 중 하나로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구체적 협력 사례로 위 과거사 관련 대법원 판결들을 제시할 것을 제안함.
2015. 8. 6. 대통령과 양승태 대법원장 오찬회동. 상고법원 입법안 적극 설명하고 입법안의 새로운 추진 동력을 얻었다고 평가함.
2015. 9. 11. 문제의 긴급조치 관련 대법원 판결(긴급조치 9호는 위헌이나 그 발령행위는 불법이 아니다)과 다른 내용의 서울중앙지법 1심 판결 선고(부장판사 김○○)
2015. 9. 18. 위 하급심 판결 선고 직후 임종헌 차장(대통령과 대법원장 회동 후 한 달 만에 행정처 차장으로 승진)이 행정처 심의관에게 법관의 잘못된 재판결과에 대하여 직무감독(징계)을 행할 필요성과 행사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
2015. 9. 19. 임종헌 차장, 보고된 문건 초안을 바탕으로 '법관의 잘못된 재판에 대한 직무감독' 문건 작성 재지시.
2015. 9. 22. 위 하급심 판결에 대한 징계 추진 관련하여 소극적 방향으로 문건이 작성·보고되자 임종헌 차장은 행정처 기조실의 김○○ 심의관에게 위 하급심 판결을 지목하여 대법원 판례를 정면으로 위반한 하급심 판결에 대한 대책 검토 지시.
2016. 1. 13. 행정처 윤리감사관실이 인사총괄심의관실 통해 해외 연수 법관들에게 각 국에서의 재판상 잘못에 대한 징계청구 사례, 근거 규정, 관련 논문 등 수집을 과제로 요청.
2016. 3. 31. 사법정책연구원 모○○ 연구위원은 '재판상 과오에 대한 직무감독권 행사와 그 한계'라는 200여쪽 분량의 보고서를 의뢰기관인 행정처 윤리감사관실에 전달.
이처럼 양승태 대법원은 상고법원 도입에 집착하여 그 수단으로 과거사 관련 대법원 판결 등을 BH에 적극 홍보하고, 박근혜 정권에 홍보한 대법원 판결에 반하는 하급심 판결이 대통령과의 회동 후 한 달 만에 선고되자 상고법원 도입에 차질을 빚을까 놀란 나머지 지속적으로 해당 법관에 대한 일련의 징계 추진까지 시도하였다.
법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지극히 타당한 판결을 선고한 하급심 판사에 대한 징계 추진은 법관 길들이기로써 징계권과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중대한 범죄행위이다. 특별조사단조차 이와 같은 행태에 대하여 "재판의 결과를 두고 담당 판사에 대한 불이익을 검토한 것으로서 재판의 독립을 침해할 수 있는 사법행정권의 남용"이라고 평가할 정도다.
양승태 대법원과 법원행정처는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모든 헌법적 가치와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이로 인해 법원과 법관, 재판의 독립은 송두리째 뿌리 뽑혔고, 과거사는 또 얼마나 후퇴했는지 모른다.
어느 한쪽에 편향되지 않은 균형감을 가져야 할 법원에서 과거사 소송의 일방 당사자인 국가와 끊임없이 교신하고, 거래하며, 그들의 곳간만을 걱정해주는 집사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하다. 이런 일련의 행태는 결국 고스란히 국민의 피해로 귀결되었다. 그럼에도 양승태는 박근혜와 마찬가지로 '집 앞 공원 성명'을 통해 현실과 동떨어진 말만 되뇌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사법권력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양승태 대법원은 어느 순간 이런 당연한 명제를 망각하고 통제받지 않는 권력으로, 스스로의 철옹성을 쌓는 것에만 몰두했다. 그 결과 우리는 철저히 부패한 사법부를 목도하는 참담한 현실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국민이 법원의 판결을 신뢰하고, 사법부에 대해 국민의 기본적 인권 보장을 기대하겠는가. 국정농단 세력에 대한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 있었다. 이제는 사법농단 세력에 대하여 철저한 심판과 새로운 사법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김명수 대법원은 양승태 대법원의 행태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사법부 내부의 이해와 시각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국민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나아갈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사법부의 존립 근거는 국민이다. 국민만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길 진정으로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민변 노동위원회/과거사청산위원회 소속 변호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