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비혼, 돌아온 비혼, 자발적 비혼 등 비혼들이 많아진 요즘, 그동안 '비혼'이라는 이유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조금 더 또렷하고 친절하게 비혼의 목소리를 내고자 용기를 낸 40대 비혼의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
"나는 앞으로 남자는 20명 만나볼 거예요."
수강 중인 한 수업에서 한 40대 후반 돌싱녀가 한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했지만 그녀는 사뭇 진지했다. 20대 초반, 가장 싱그럽고 예뻤던 때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했고 딸을 낳았다.
남들처럼 행복할 줄 알았지만 꿈같은 허니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혼 후 홀로 딸을 키우며 집안일 하랴, 돈벌랴 그렇게 1인 3역을 조그만 몸으로 다 감당하는 사이, 어느덧 40대 후반에 이른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연애를 못한 것이 가장 억울하더라고요."
가장 싱그럽고 예쁜 시기를 통편집 당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태도 안 나는 고생만 하다가 어느덧 이른 중년. 서럽고 억울할 만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50대 인생 선배 언니들이 힘차게 그녀를 응답해 주었다.
"아직 청춘이야. 지칠 때까지 만나 봐."
그녀가 한 여성으로서 사랑받는 행복과 환희를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참 건강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누구보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앗, 뜨거워' 소리가 나올 만큼 뜨거운 연애를 하기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싱글인 경우, 나이 들어도 사랑을 바라고 상대를 유혹할 수 있는 사람, 언제든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겐 건강한 텐션이 느껴진다. 그리고 멋있다. 요즘은 그녀처럼 40, 50대여도 매력을 놓치지 않은 사람들을 접하곤 한다. 특히 남성에게 선택 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기다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욕망을 건강하게 표현하는 싱글 여성분들을 보면 박수를 쳐주고 싶어진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어떤 중년 싱글 여성이 비밀번호를 4836이라고 정했다는 글을 봤다. '48살에 36살짜리 연하 만나지 말라는 법 없다'는 바람이란다. 나야 주변머리 없고 능력도 안 돼서 그 정도의 배포는 부릴 줄 모른다 하더라도, 그 여성의 포부는 '좋아요 10개'를 누르고 싶을 만큼 유쾌했다.
돌아보면 지금은 '뭐, 어때?' 하는 것들인데 과거에는 '그건 절대 안 되지' 했던 것들이 꽤 있다. 그 중 하나가 '연하남은 안 된다'는 거였다. 그래서 20, 30대 때 간혹 한 살이라도 어린 친구들이 다가오면 '어딜 감히 누나한테!' 하는 마음으로 딱 잘라버리는 망언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실소가 나오는 일이다. 그 시절에는 연상연하커플이 없는 분위기이기도 했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좋으면 그만일 텐데... 따지고 보면 대세를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한 내 성정 탓인 것 같다.
한 번쯤은 통념이라는 것, 내가 정해놓은 틀이라는 것을 넘어볼 걸. 마흔이 넘고 보니 그런 점이 아쉽다. 내 성정에 사고를 쳐봐야 멀리 못 갈 게 뻔했을 텐데, 난 무던히도 금을 밟거나 금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살았던 것 같다.
그게 안전하다고 여겼으니까. 물론 조심조심 살아온 덕분에 나름의 유익도 있었지만, 돌아보면 안전하기만 하다는 게 과연 좋은 거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실수하기 싫고, 정상(?)이 아닌 길을 가는 것이 두렵고, 사람들의 눈이 신경 쓰이고 이런 불편함과 위험을 감수하는 게 두렵고 싫어서 '안전지대'라는 선을 만들고 넘어가지 않으려 애쓰며 살았다. 관계도 어느 선 이상은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 생각해 보면 비겁하고 이기적이면서 스스로를 가두고 주저앉히는 패턴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도 마찬가지 아닐까. 늘 무슨 일이든 일어나길 바라지만,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안전한 상태에만 머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놓친 인연이 얼마나 많았을까.
"너무 위험해서 어쩌면 모든 걸 잃을지도 모르는 선을 넘는 순간, 기적은 시작된다. 선은 넘어야 제 맛, 금은 밟아야 제 맛이다. 모든 길에 뜻밖의 샛길이 있듯, 모든 경계에는 비밀스러운 틈새가 있다." - 정여울 <마음의 서재>
마흔을 넘긴 싱글 여성들을 만나 이런 저런 고민을 나누다 보면 '40대에도 과연 로맨스라는 게 찾아올까?' 하는 말들을 한다. 얼마 전 만난 후배 한 명도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언니. 지금 만나고 있는 썸남이 남편감으로는 그다지 좋은 사람 같지는 않아. 그래서 머뭇거리게 되는데 이 사람을 놓치면 또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아. 그러니까 자꾸 초조해져."
실제 20, 30대처럼 기회가 쉽게 오진 않는다. 그래서 난 후배에게 '썸남이 있다는 것만도 좋은 일'이라고 격려해줬다. 현실적인 어려움과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기회가 온다면, 사회의 규범을 어기는 관계를 제외하고, 위험 요소라고 생각되는 금을 일단 밟아보라고 말했다. 가보고 아니면 다시 되돌아오면 되는 거니까.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돼. 저래서 안 돼. 그렇게 만들어 놓은 내 마음을 선을 넘어야 기적도 일어날 수 있지 않겠니?"
'금을 밟아라, 아니어도 기회는 또 온다' 등등 후배에게 실컷 침 튀기며 훈수를 두었지만, 실은 여전히 제 머리는 못 깎는 겁 많은 나한테 하는 충고이자 기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