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비혼, 돌아온 비혼, 자발적 비혼 등 비혼들이 많아진 요즘, 그동안 '비혼'이라는 이유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조금 더 또렷하고 친절하게 비혼의 목소리를 내고자 용기를 낸 40대 비혼의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
"그 사람 있지?"
"누구?"
"그 프로그램에 나왔던 사람."
"그 프로그램이 뭔데?"
이런 대화도 있다.
"거기가 어디야?"
"어디?"
"우리 지난 봄에 갔던 거기 있잖아."
"지난 봄에 갔던 데가 한두 군데니?"
스무고개도 아니고 이 정도면 독심술을 배워야 할 수준이다. 언제부터인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저' 같은 대명사가 많아졌다. 희한한 건, 어느 순간엔 귀신처럼 알아듣는다는 점이다.
"요즘 조금만 일하면 너무 피곤해."
"허리가 아파서 병원갔더니 퇴행성 디스크래."
"요가나 필라테스 같은 운동을 꼭 해줘야 해. 그리고 OO 영양제가 우리 나이에 좋다더라."
아프다는 이야기, 약 이야기도 많아졌다. 전화 통화든 만나서 수다를 떨든 아프다거나 건강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엄마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할 때 왜 저렇게 자꾸 아프다는 이야기를 할까 하고 지겨워했는데 이제는 내가 엄마가 된 것만 같다.
아마 오십 언저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이 될 증상들이다. 동시에 이런 증상들은 내리막길에 접어들었음을 암시하는 단서들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내리막길의 전조로 보이는 증상들은 얼마든지 있다.
전에 없이 음식을 먹다가 흘린다든지, 길을 가다가 공연히 넘어지는 일도 잦아진다. 이런 일들이 생길 때마다 이제 '쉰'이라는 나이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그다지 반갑지 않은 실감이다.
<중년, 잠시 멈춤>이라는 책에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1903년에 발행된 <코스모폴리탄>에서만 해도 50세 여성은 원숙하고 경험이 풍부한 존재로 그려졌다고 한다. 그때 잡지에는 "쉰에 이른 여성은 '독특한 매력과 아름다움, 원숙한 시야, 교양 있는 지성, 세련된 다양한 재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 기사가 실렸다.
여성의 능력이 인정받으면서 여성의 권리도 확대되었는데, 당시 영국에서 여성들은 1870년과 1882년의 '기혼 여성 재산 법안'을 통해 이혼할 권리와 재산을 소유할 권리 등을 얻었고, 1918년에는 마침내 선거법 개정을 이끌어냈다.
"중년이란 말이 부정적으로 변한 것은 1920년대 대량생산과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관리법'이 대두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젊음과 높은 생산성을, 중년과 효율성 감소를 연관 짓는 인식이 두드러졌다." - <중년, 잠시 멈춤>
이때부터 나이는 효율성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었고, 이런 과학적 관리법이 확산되면서 중년기를 보는 시각도 확연하게 변한 것이다.
"예전에는 나이 끝수를 반올림했지만, 요즘 인구조사 설문지에는 나이 끝수를 잘라먹고 기록하는 것, 어떻게든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1920년대와 1930년대부터 머리 염색약 판매량이 급등한 것이 중년기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실례들이다." - <중년, 잠시 멈춤>
겉모습을 젊게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게 된 것도 이 이후부터라고 한다. 공연히 이 말에 뜨끔했다. 언제부터인가 거울 앞에 서는 것이 불편할 때가 있다. 특히 염색할 때가 지나서 정수리와 귀옆에 흰머리가 솟아 있는 걸 볼 때면 더욱 심란해진다.
너무 바빠서 한 달 반 정도 염색을 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거울을 보면 느낌상 10년은 더 늙어보였다. 바쁜 일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미용실에 가서 염색부터 했다.
"염색만 안 하고 살아도 좋겠어요. 신경 쓰여서 혼났어요."
내가 투덜거리자 내 또래인 미용실 원장님이 손으로 자기 옆머리를 들어올려 보이며 말했다.
"저도 이쪽이 다 흰머리에요. 저는 그냥 내버려둬요."
조금 밝은 색으로 염색을 한 탓인지, 내가 거울상으로 봤을 때 원장님의 흰머리는 그다지 티가 나지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제가 만나는 사람 중에 몇 명이나 가까이 다가와서 자세하게 제 흰머리를 보겠어요. 사람들은 내 흰머리를 보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어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마음에선 저항감이 몰려왔다.
"그냥 내가 보기 싫어요. 좀 거슬려요."
그렇게 대답하고 나자 스스로에게 질문이 생겼다.
'누군가 가까이 다가와서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내 흰 머리가 나는 왜 거슬리는 걸까.'
이 질문 앞에 서니 무서운 상대를 피해 요리조리 도망다니다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꼼짝없이 상대를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젊음과 높은 생산성, 중년과 효율성 감소를 연관 짓는 인식이 두드러지는 이 세태 속에서 생산성이 떨어지고, 효율성을 감소시키는 부류로 내가 분류된 것에 어떻게든 저항하고 싶었던 마음이 들통났다.
어떻게든 젊게 보임으로써 아직 나는 쓸모 있다고 증명하고 싶었달까. 게다가 40대는 어떻게든 억지로 30대에 교집합처럼 얹혀 갈 수 있었는데, 50대는 어쩐지 '진짜 중년' 인증을 받고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더 저항감이 들기도 했다. 애처로운 몸부림이다.
"원장님. 제 마음이 아직 제 나이를 못 쫓아가나 봐요. 나이 들어 보이기 싫어서 어떻게든 젊음을 유지하고 싶은 거죠. 제가 제 나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네요."
급작스러운 자기 고백에 원장님의 동공이 흔들린다. '내가 잘못 말했나?' 하는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런 마음은 당연한 거죠"라며 분위기 수습용 맞장구를 쳐주었다. 평소의 그녀를 알거니와 착하고 세심한 사람이다. 공연히 마음 쓸까 봐 명랑하게 답했다.
"원장님의 말이 맞아요. 저도 이제 제 흰머리를 좀 참아봐야겠어요."
진심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작년에 완경 진단 받고 여성 호르몬제를 복용하다가 자궁의 혹 때문에 끊은 지 얼마 안 된 마당에, 염색마저 끊을 용기가 아직은 없다. 하지만 이 또한 끊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젊음에 연연하는 마음이 언젠가 완전히 끊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때까지 단계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희끗거리는 머리를 드러내는 시간을 조금씩 늘리고, 이제 내리막길을 천천히 걸으며 세상의 조명에서 밀려나도 괜찮은 마음의 훈련을 해야 할 때라는 걸 알겠다. 이제 '생산성이 떨어지고, 효율성을 감소시키는 존재'로 분류된다 할지라도 '젊음'이라는 주류 세계에서 벗어난 나를 받아들이며 지금의 내 존재와 삶에 충실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미 남들은 '중년'으로 봤을 텐데,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서 나만 혼자 인정하지 않았던 '중년'을 받아들이고 보니, 바스락 밟히는 낙엽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아, 진짜 이제 중년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