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비혼, 돌아온 비혼, 자발적 비혼 등 비혼들이 많아진 요즘, 그동안 '비혼'이라는 이유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조금 더 또렷하고 친절하게 비혼의 목소리를 내고자 용기를 낸 40대 비혼의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
얼마 전, 하고 있던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면서 후임 방송작가에게 인수인계를 할 때였다. 후임은 싱그러움이 온 몸으로 뿜어져 나오는 20대였다. 그간 여러 사정이 있어서 1년 동안 방송작가 일을 쉬었던 탓에 자신이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힘겹게 잡은 기회인 만큼 잘해내고 싶은데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불안한 눈치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무리할 때쯤, 혹시 더 궁금한 게 있냐고 물었다. 후배는 잠시 쭈뼛거리며 망설이더니 어렵게 입을 떼었다.
"제가 올해 스물여덟 살인데요, 지금 이 일을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은 걸까요?"
어머나. 그 친구의 표정을 보니 웃으면 안 되는 진지한 상황인데, 정말 매우 몹시 미안하게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으나 꾹 참았다. 얼른 얼추 결이 맞는 진지함을 갖추고 '난 이 일을 마흔에 시작했고, 서른 넘어서 한 사람도 많다, 그러니 전혀 늦은 게 아니다. 멀리 놓고 보면 이 2-3년 늦고 빠르다 해서 결정되는 거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주었더니 조금 안도하는 눈빛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실례가 될 수도 있는데 자꾸 엄마 미소가 지어졌다.
'스물여덟이 늦었다고 생각하는구나. 난 지금 마흔 초반만 되어도 바랄 게 없겠는데.'
젊은 후임이 보이는 불안과 걱정에서 봄나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 젊음이 짊어진 무게가 가볍다거나 내 것보다 못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그 때에는 그만큼의 무게가 있고, 그것이 가장 무거운 법이니까.
"이제 쉰이 코앞이야"
돌아보면, 나도 서른을 앞두고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친구나 동료들은 승진을 하거나 결혼을 하며 인생의 한 매듭을 맺으면서 나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 계속 가기에도 다른 길을 찾기에도 늦은 것 같은 어정쩡한 포지션. 어떤 불안이고 두려움인지 알 것 같았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20대였을 때와 지금의 20대가 겪는 상황은 분명히 다를 테니 내가 헤아릴 수 없는 영역도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럴 때 자칫하면 나도 모르는 새 꼰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선을 넘지 않으려 몇 번이나 허벅지를 꼬집었는지 모른다.
돌아오는 길, 친구와 통화하면서 그 친구가 정말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친구가 인정머리 없이 팩트 폭격을 날린다.
"그 친구는 잘할 테니, 너 걱정이나 해. 난 너가 걱정이다. 이제 쉰이 코앞이야."
아. 맞다. 내 코가 석자다. "눼~눼~" 하고 얼른 오지랖을 접었다. 프리랜서 작가로서 동동거리며 불안정하게 살아 왔는데, 사실 얼마나 더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년이 점점 가까워 온 건 확실히 알겠다. 나름의 살 길을 모색해 보지만 쉽지 않다.
작년 언젠가 궁금해서 구청에 취업상담을 받아본 적이 있는데, 그때 상담원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지금 나이로는 해왔던 직종으로나 사무직으로는 자리 얻기가 어렵고요, 건물 청소
같은 건 할 수 있어요."
나이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하물며 1년이 지난 지금이야 말해 무엇하랴.
'스물여덟의 후배가 늦었다고 느끼는 나이의 무게와 마흔여덟의 내가 느끼는 나이의 무게는 같을까. 늦었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후배의 질문은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지금의 내가 이 정도만 되도 좋겠다고 여기는 마흔 초반 때를 돌아봐도 마찬가지다. 막 마흔을 넘긴 나이에 방송작가라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게 나이였다.
'딱 30대 초중반이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너무 늦은 거 아닐까.'
그때뿐만이 아니다. '지금'은 좀 '늦었다'고 생각하는 병에 걸린 사람처럼 늘 늦었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도 마흔여덟의 나이는 무엇을 하기엔 늦었다는 생각과 종종 충돌한다. 분명 몇 년쯤 지난 다음에는 이 마흔여덟도 '그 정도만 돼도 좋은' 젊은 날일 텐데 말이다.
그래서 요즘은 나이가 걸릴 때마다 지금에서 5년 더 나이 들었을 때를 생각해 본다. 53세 때 48살의 나를 보며 '그때 좀 하지 그랬어?' 하는 후회를 할 것 같으면 웬만해선 하고 만다.
중요한 건 내가 내 나이에 갇히지 않고, 사회의 통념이 구겨 넣으려 하는 나이에 등 떠밀리지 않고 해 보는 것이다. 물론 그래도 현실 앞에서 좌절할 때가 종종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 봐서 생각해 봐도 될 일이다. 어차피 인생은 살아보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대명사이므로.
기회는 생각지도 못한 때,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얼마 전 후임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잘하고 있냐고 물으니 다행히 아직까지는 사고 없이 하고 있단다. 오케이. 이쯤에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내 자리는?'
사실 후임에게 물려준 자리는 전부터 해 봤으면 하는 일이었다. 욕심은 나지만 도무지 시간적 여유가 안 되었고 무리를 했다가는 모두에게 민폐가 될 것 같아서 그만둔 터였다. 급한 일이 끝나고 다시 일을 알아보고 있는 요즘, 다시 '내 자리'에 대한 질문이 고개를 든다.
다행히 이젠 나이 탓을 덜하게 된다. 대책 없는 낙관론자여서인지, 능구렁이가 된 건지 알 수는 없다. 그저 둥글게 둥글게 가다 보면 지구는 둥그니까 어느 사이에 내가 앉을 의자가 생긴다는 것쯤은 알게 되었을 뿐이다.
스스로 늦었다고 주저앉지 않는 한, 기회는 생각지도 못한 때,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방문한다. 젊을 때보다는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길어지고, 선택의 폭이 적어질 수는 있어도, 일도 '인연'과 같아서 내 것이 되려면 어떻게든 나에게 온다. 그것이 나에게 왔을 때 어떻게 다루느냐는 전적으로 나의 몫이지만.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되게 하려고 무리하지 않기. 내가 궁하다 해서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지 않기. 늦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냥 해 버리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초조해 하지 않기.
요즘 내 마음 속에 붙여두고 자주 꺼내보는 메모들이다. 이 목록들은 그동안 사회생활이라는 서바이벌 게임 속에서 치이고 닳으면서, 또 수없이 '이제 너무 늦었다'는 병과 싸우며 터득한 생존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