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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 노는 아이가 순하다고? 순한 아이의 역설

큰 딸은 14개월 즈음 '핑크퐁'에 입문했다. 세상물정 모르는 돌쟁이지만 "아기 상어 뚜루룻뚜루~" 가사만 흘러도 울음을 뚝 그쳤다. 아마도 핑크퐁 유튜브 시리즈를 보여줌으로써 육아의 고단함을 달랬던, 나와 남편 덕분(?)일 것이다.

그 해 크리스마스,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줄 선물을 핑크퐁 장난감으로 낙점했다. 요즘이야 핑크퐁 장난감이 흔하지만, 2016년에는 그렇지 않았다. 마트에는 물론이고, 포털 검색창에 '핑크퐁'을 쳐도 고작 스티커책 몇 권만 나왔다. 포기하면 그만인데, 기어이 핑크퐁 전용 스토어를 찾아냈다. 신세계였다. 노래하는 인형, 그림자놀이 빔, 목욕가운. 온갖 상품들이 줄 지어 있었다.

결국 가방, 사운드 인형, 캐럴 사운드북, 색칠공부까지 쓸어담았다. 당시 핑크퐁 사운드 인형은 중고로도 구하기 힘든 '육아 꿀템'이었다. 나 같은 부모가 한 둘은 아니었는지, 품절이었다. 포기할 수는 없다. 재입고 정보를 기어이 얻었다. 재입고 예정일 아침 9시, 상품 알림이 울리자마자 바로 주문했다.

"짜잔! 핑크퐁 인형이야. 너무 좋지~ 손바닥을 마주대면 켜져. 자, 어서 눌러봐."

아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좋아서 환하게 웃었다. 바라던 모습이었다. 그렇게 아이는 하루에도 수 십 분 핑크퐁 장난감들을 갖고 놀았다.
 
 2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 딸에게 핑크퐁 사운드 인형, 가방, 사운드 북, 색칠공부를 선물했다.
2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 딸에게 핑크퐁 사운드 인형, 가방, 사운드 북, 색칠공부를 선물했다. ⓒ 최다혜
간소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던 즈음이었지만, 장난감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이는 장난감이 많으면 많을수록 혼자 잘 놀았기 때문이다. 거실에는 늘 아이 장난감이 주욱 펼쳐져 있었다. 아이는 펼쳐놓은 장난감 사이에서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해갔다.

장난감이 많은 게 문제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아이가 혼자 노는 건 당연한 거고, 오히려 다 큰 어른이 놀아주는 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심심함을 견디면서 생각도 하고, 문제 해결력도 늘며, 더 나아가서는 창의력 상승할 거라 기대했다.

문제는 엉뚱한 데서 발생했다. 아이가 혼자 놀 수 있도록 장난감을 잔뜩 사준 게 문제였다. 이병용 PD는 책 <장난감을 버려라 아이의 인생이 달라진다>를 통해 '장난감 중독'을 경고한다.
 
 <장난감을 버려라 아이의 인생이 달라진다> 책표지
<장난감을 버려라 아이의 인생이 달라진다> 책표지 ⓒ 살림
 
'장난감은 놀이의 매개체로 존재할 뿐, 그것이 자체적인 의미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곽노의 교수는 장난감을 놀이 하고자 하는 대상으로 대하지 않고 장난감 자체에 몰입하는 행동을 '장난감 중독'이라 정의했다.'
- <장난감을 버려라 아이의 인생이 달라진다> 중

아이들은 본래 혼자 놀지 않는다. 지루한 시간을 견딜 완벽한 장난감들이 눈 앞에 차려졌을 뿐이다. 장난감이 많을수록, 장난감의 기능이 화려하고 다양할수록 아이는 혼자 잘 놀았다. 그렇게 아이는 혼자 잘 노는 '순한' 아이로 만들어져 갔다. 그러나 장난감에 의존해서 혼자 노는 거라면 그건 순한 아이가 아닐 수 있다. 장난감 없이 놀 수 없다면, '장난감 중독'을 의심해야 한다. 
 
"장난감들이 정교하고 많은 기능을 발휘하게 되면서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 장난감을 감상하는 도구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갖가지 기능을 가진 장난감이 아이들의 마음을 유혹하지만 이 유혹은 아이들의 놀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소유욕이나 감상을 위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 임재택 교수

키즈카페를 떠올렸다. 여기에선 50평 정도의 공간에 또래 아이들 열댓 명이 모여 논다. 그렇지만 같이 장난감으로 노는 경우는 드물다. 끝도 없이 펼쳐진 수 많은 장난감들을 둘러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장난감 한두 개를 갖고 노는 게 전부다. 지겨워지면 또 다른 장난감으로 놀면 그만이다. 아이들이 서로 이야기 하는 순간은 남이 놀던 장난감을 뺏거나, 갖고 노는 걸 뺏기지 않으려 할 때가 전부다.

키즈카페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모여 놀지만, '함께' 어울려 놀지 않는다. 놀이터를 생각하면, 키즈카페의 문제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논다. 생판 모르던 아이라도, 또래든 나이가 더 많든 개의치 않고 술래잡기를 하거나, 흙을 판다. 몸으로 부딪쳐 노는 야외를 생각하면, 장난감은 재밌는 자극을 줄 뿐, '건전한 놀이' 그 자체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충격적인 것은 이 조사에서 '혼자놀기'를 하지 않는 아이는 조사 대상 103명의 아이 중 단 1명 밖에 없다는 것이다.'
- 어린이집 만4세~5세 아동을 대상으로 한 조사

키즈카페만 그런게 아니었다. <장난감을 버려라> 팀이 어린이집을 대상으로 아이들의 놀이 형태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혼자놀기를 하지 않는 아이는 103명 중 단 1명 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이미 '어울려 놀기'보다, '각자 장난감으로 놀기'에 익숙해졌다.

이번에는 유치원에서 의도적으로 장난감을 없앴다. 아이들이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넓으니 더 좋다" 외치며 교실을 뛰었다. 평소 잘 나가지 않던 유치원 정원에서 개미를 관찰하기도 했다.

선생님들께서도 장난감 없는 자리를 대신해 뒷산으로 산책을 데리고 가셨다. 아이들은 산에서 주워온 나뭇가지와 폐타이어를 교실로 갖고와 멋진 터널을 만들었다. 장난감을 대신해 친구와 놀고, 선생님과 산책했으며, 버려진 물건들로 새로운 놀잇감을 만들었다.

이미 유럽에서는 어린이집, 유치원에 장난감을 없애는 중이다. 독일 페스탈로치 프뢰벨 하우스에는 장난감이 없다. 대신 아이들은 빈 공간에 종이박스를 모아 성을 쌓거나, 천을 걸쳐 탐험 기지로 만든다. 심지어 손축구 게임도 목공을 통해 스스로 만들었다고 하니, 장난감 없어도 아이들은 기가 막히게 더 잘 놀았다.

스웨덴이나 덴마크 등 북유럽에서는 '숲 유치원'이 활성화되어 있다. 말 그대로 '숲' 유치원이다. 아이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숲에서 논다. 대신 날씨에 맞게 옷을 잘 갖춰 입는다. 아이들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무릎이 까지지만 개의치 않는다. 물론 부모도 잘 다쳐본 아이가 다음에 다치지 않음을 안다.
 
 영종도 하늘숲유치원
영종도 하늘숲유치원 ⓒ pixabay
 
아이들은 혼자 놀지 않는다. 사람과 함께 노는 걸 가장 좋아한다. 장난감은 오직 함께 노는 데 쓰이는 도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장난감을 잔뜩 사준다고, 아이는 행복하지 않다.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갖는 쾌감은 택배 박스를 뜯는 그 순간일 뿐이란 거,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아이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다.

'혼자 놀 줄 아는 아이가 순하다'는 생각을 접었다. 이 책을 통해 배운 가장 확실한 사실 하나는, 아이는 사람과 어울려 놀 때 가장 즐거워한다는 점이다. 그 사람은 부모일 수도, 또래 친구일 수도, 형제 자매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장난감은 '사람'

서서히 놀이 방법을 바꿔봤다. 전에도 아이들과 놀아주면서 적당한 호응을 해주긴 했지만,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엄마, 놀아요" 하며, 손을 잡아 끄는 탓에 꾸역꾸역 놀았을 뿐이다. 원래 아이 놀이에 어른은 필요 없다는 기존 관념 때문이었다. 이제 생각을 바꿨다. 애들은 원래 누군가와 함께 노는 거다.
 
"가장 좋은 장난감, 그건 엄마죠. 그는 사람이에요. 저는 사람이 가장 좋은 장난감이라고 생각합니다."
- 대구대학교 재활심리학과 송영혜 교수
 
아이와 함께 운동장으로 갔다. 예전에는 운동장 주변을 산책하거나, 아이 흙장난을 지켜봤다.

"까꿍아, 우리 달리기 시합하자."

같이 할 수 있는 놀이를 먼저 제안했다. 핑크퐁 장난감 꾸러미를 사다 바칠 때보다 아이 눈은 더 반짝였다. 철봉까지 뛰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놀이지만, 아쿠아리움에서 펭귄이 춤추는 거 볼 때보다 더 좋아했다. 우리는 그렇게 다섯 번, 50m 달리기를 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아이 모습에서 건강한 생명력을 느꼈다.
 
 장난감 대신 운동장에서 뛰어 놀고, 흙장난도 했다.
장난감 대신 운동장에서 뛰어 놀고, 흙장난도 했다. ⓒ 최다혜
 
이 책을 읽은 후, 뭐든 같이 하려고 노력한다. 그게 싫지 않다. 오히려 아이가 이제야 진짜 가족이 된 것 같다. 내가 돌보는 대상이라는 시선에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 아이는 나의 친구이기도 했다.

같이 놀기 시작한 지 2주 째. 아이는 더 밝아졌다. 떼도 덜 쓰고, 안 부리던 애교도 잘 부렸다. 윙크를 연발하고,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춤을 출 줄이야! 심지어 친정에 가면 TV 앞을 떠나지 못 했는데, 20분 보더니 끄고 놀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부족한 아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나는 못 하는 게 없어!"라는 말도 했다.

아이가 변하니, 나도 신이 났다. 더 이상 미룰 것도 없었다. 장난감 없는 거실을 꾸몄다.

장난감 없는 거실을 만들다
 
 장난감을 치우기 전 거실(첫번째, 두번째), 장난감을 서재로 옮긴 후 거실(세번째, 네번째)
장난감을 치우기 전 거실(첫번째, 두번째), 장난감을 서재로 옮긴 후 거실(세번째, 네번째) ⓒ 최다혜
 
'장난감은 놀이 그 자체가 아닌 매개체일 뿐.'

이 말을 실천하기 위해, 거실 장난감을 치웠다. 아이가 잘 찾지 않는 장난감들을 따로 모아 큰 이불 가방에 넣었다. 이 가방을 잘 안 보이는 구석으로 치워뒀다. 아이가 찾을 때 꺼내주기로 하고, 한 달 후에도 찾지 않으면 필요한 사람에게 주려 한다.

장난감은 죄가 없다. 아이들 놀이 매개체로 훌륭한 도구이기도 하니, 굳이 없앨 필요는 없다. 아이들이 주로 노는 거실에서 장난감을 치우고, 서재로 죄다 옮겼다. 장난감은 놀다가 필요할 때 갖고 오기로 한다. 이제 놀이의 중심은 '장난감'이 아니라, '관계'가 되어야 한다.
 
'오히려 장난감은 아이들 놀이의 매개체로서 훌륭한 소재이다. ... 문제는 누구와 함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느냐는 것이다. 또한 어디서 가지고 노느냐는 것이며, 어떻게 가지고 노느냐 하는 것이다. 교우관계, 창의력, 지능발달, 상상력 ...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쥐어주며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들은 오히려 아이들이 장난감을 버리고 누군가의 손을 잡았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넓어진 거실에는 놀이매트와 미끄럼틀을 갖고 왔다. 빈 거실 책장은 우리 부부가 읽고 싶은 책으로 메웠다. 고백하건대, 장난감에 의존하는 건 아이가 아니었다. 바로 '나'였다. 아이들은 장난감이 없어도 잘 놀았지만, 나는 장난감이 없으면 육아에 자신 없었다. 이제 장난감에 대한 태도를 바꾸려 한다.

산책하기, 집안일 거들기, 같이 장난감을 이용하여 놀기, 로션 바르며 간질이기. 살을 맞대며 함께하는 따뜻한 가족이 되기 위해 돈 주고 산 물건을 치웠다. 물건을 덜고, 비울수록 삶이 우아해지는 건, 육아의 반 이상을 차지하던 장난감도 마찬가지였다.

올 크리스마스에는 어린이집 행사에 필요한 장난감을 빼고 일절 사주지 않으려 한다. 줄이고 버리고 간소화하면 아무것도 없어서 허전할 듯하다. 그러나 빈 자리에는 사람이 남는다. 물건이 나가면, 그 자리를 사람이 채워야 한다. 이제 장난감이 없는 거실을, 아이들과 나와 남편이 채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dahyun0421)에도 실립니다.


장난감을 버려라 아이의 인생이 달라진다 - 아이의 몸과 마음을 망치는 '장난감 중독'에 관한 충격 보고서

이병용 지음, 살림(2005)


#최소한의소비#장난감을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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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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