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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편집자말]
올해 들어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었다. 막 그렇게 된 시기의 나는 아홉수가 끝났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심란한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또 다른 출발점에 선 느낌이었다. 나이의 뒷자리가 '0'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숫자, 그야말로 새로운 시작. 하지만 이제 그 숫자가 1이 되고 점점 3과 4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 불안함이 엄습했다.

떠나버린 출발선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는데 나는 그만큼 성장했는지를 생각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조급한 마음이 든다.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게 된다. 도대체 365일을 지나는 동안 뭘 했는지를 질문한다. 그리고 후회한다. 그 때 그 일을 했어야 했다며. 혹은 그런 선택을 하는 게 아니었다고.

하긴 후회를 하는 것이 꼭 지금 뿐이랴. 한 해의 상반기를 지났을 때도, 생각보다 한 달이 너무 빨리 흘렀을 때도, 때로는 침대를 벗어나지 않고 빈둥거리다 늦은 오후가 되었을 때도 나는 후회를 했다. 벌써 때가 이렇게 되었는데 그동안 도대체 뭘 했느냐며. 혹은 왜 그런 쓸데 없는 일을 해서는 시간을 허비했냐고. 물론 성찰은 중요하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삶을 사는 것은 똑같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길 반복하겠다는 뜻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보통의 경우 성찰은 반성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다짐을 하게 된다. 앞으로는 이전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즉 성찰과 반성은 미래지향적인 일이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과거에서 빠져나올 출구가 되어준다. 다음이라는 게 있다. 하지만 후회에는 그런 것이 없다.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 과거를 바꾸지 않는 이상 후회는 끝나지 않을텐데 그런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살아가며 절대 피할 수 없는 일, 후회

나는 반복되는 후회를 '알코올중독자의 딜레마'에 비유하곤 한다. 술을 주도적으로 즐기는 '주당'이 아니라 그야말로 습관적이고 의존적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들 치고 그런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이들을 별로 보지 못했다. 대부분은 술에 끌려다니며 일상생활이 차질을 빚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괴로울 때 중독자들은 다시 술을 찾게 된다. 술만큼 효과적으로 그들을 위로할 물건을 찾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술 때문에 괴로워서 다시 술을 찾는 인생. 후회도 마찬가지다. 내가 후회를 하는 동안 세상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자괴감에 빠져 '나는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다 어느덧 정신을 차리면 하루가 훌쩍 지나있던 때도 있었다. 그러면 그 순간에 나는 또 자책을 한다. 후회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후회한다. 사실 알코올중독은 치료라도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매순간 실수없이 최선의 선택을 하기는 불가능하다. 후회할 일은 늘 생기기 마련이다. 이렇게 보니 술보다 후회가 더 무섭다.
 
 <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 반비
후회가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적어도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니면 빨리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이라도 있지 않을까. 나는 레베카 솔닛의 에세이 <멀고도 가까운>을 읽다 실마리를 찾았다. 이 책에서 솔닛은 자신이 미국의 서부사막을 여행하던 때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한다. 여행 중 찾은 식당에서 솔닛은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중 그랜드캐니언을 따라 보트를 타고 내려가고 싶다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런데 우연히 그 근처에 앉아있던 래프팅 안내인이 자신이 이끄는 여행팀에 공석이 생겼는데 함께 하겠냐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래프팅 코스는 적어도 일주일에서 걸리는 여정이었다. 누구든 단 시간에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일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낯선 사람에게서 고작 20분의 설명을 들은 솔닛은 이렇게 대답한다.

"네, 갈게요."

정말 좋은 이유가 없다면 절대로 모험을 거절하지 말자

레베카 솔닛은 어떻게 그런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에게 '정말 좋은 이유가 없다면 절대로 모험을 거절하지 말자'는 좌우명이 있다고 말한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다가온 제안을 승낙하자는 뜻이다. 그래서 솔닛은 단 20분 만에 래프팅 여행에 참여하겠다고 결정하고 머나먼 아이슬란드에서 열리는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겠냐는 제안도 곧바로 수락한다. 이 정도의 대범함이 있었으니 솔닛이 세계적인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문도 들었다. 래프팅이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으면 어쩌지? 재미가 없을뿐더러 심지어 고생만 엄청나게 할 일이라면? 그리고 글을 쓰라고 아이슬란드까지 초대를 받았는데, 그 때가 작가로서 슬럼프를 겪는 시기면 어떡하지? 아니면 절대로 집에서 부재해선 안 되는 일이 생겨버린다면? 그러면 솔닛은 괜히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그녀는 그렇게 될까 한 순간도 두렵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레베카 솔닛은 책에 자신의 친구인 소피의 이야기도 담았다. 역시나 미국에 살던 소피는 나라의 반대편에 사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북미 대륙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한다면 어마어마한 장거리 연애였던 셈이다. 그런데 무려 연애의 초기에 소피는 직장을 그만두고 그 남자와 함께 떠나겠다는 결심을 한다. 물론 그녀의 부모님은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알 수 없는 세계로 떠나는 것은 큰 실수라는 조언을 한다.

하지만 솔닛은 다른 이야기를 건넨다. 만약 '가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면 소피는 이후에 무슨 일이 생겼을지 영원히 궁금해했을 것이라고. 그녀의 것이 될 수도 있었을 보물을 거절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라고. 평생을 그 남자를 궁금해했을 것이라고.

감사합니다, 후회 할 수 있어서
 
 나는 경험했기에 후회한다. 무언가를 알게 되었기에 후회한다.
나는 경험했기에 후회한다. 무언가를 알게 되었기에 후회한다. ⓒ Pixabay

그런데 만약 일이 잘 풀리지 않게 되면 어떨까. 생각보다 남자는 괜찮은 사람이 아니고 소피가 애꿎은 직장만 날려버린 꼴이 된다면. 솔닛은 말한다. 그렇게 되더라도 일단 노력은 했으니 최소한 무언가를 알게 될 거라고. 그리고 알게 될 그 '무언가'는 교훈이 될 수도 있지만 단순히 소피와 남자가 맞이할 결말일 수도 있다.

여기까지 읽고 나서야 나는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어떤 일을 하겠다고 선택하고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망치고 후회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내 선택의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것은 경험으로 남는다. 이야기의 끝이 막연하고 불투명하게 남지 않으니 더 이상 궁금해 할 필요도 없어진다. 모든 것이 명확하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그런 후회는 해도 괜찮다. 빨리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어떤 일을 하지 않고나서 하는 후회. 그 남자를 붙잡아야 했다고, 제안을 거절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너무 일찍 포기해선 안 되었다며 하는 후회. 그런 후회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서부터 나는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다. 인간은 생각보다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난 동물이다. 주춤한 것은 판단이 아니라 몸이었을 것이다. 직감적으로 나는 알았을 것이다.

어떤 관계나 일은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고 심지어 나를 파괴할 수도 있음을. 당혹스러울 만치 다양한 이유로 비명횡사하기 쉬운 세상이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복구가 불가능 할 정도로 사람이 무너지는 일도 많다. 나는 어떤 의미에선 잘 사는 것 보다 현명하게 사는 게 더 필요한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무서워서 물러선 게 아니다. 현명하게 나를 지킨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지 않고 하는 후회도 빨리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결론은 이렇다. 나는 경험했기에 후회한다. 무언가를 알게 되었기에 후회한다. 혹은 나를 지켰기에 후회한다. 살아 남았기에 후회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후회하는 일도 억울하지가 않다. 나는 무사히 인생의 치열한 한 시기를 지나왔기에 아니면 현명하게 나를 망가뜨릴 풍파를 비켜왔기에 뒤를 돌아본다.

뒤로 돌아서서 지나온 길을 보는 것은 내가 어느 정도 온전한 상태를 유지했을 때나 할 수 있는 행위다. 생각해보면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중요한 사실이 아닐까. 그러니 후회해도 괜찮다. 후회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 수 있기를 기도한다.

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반비(2016)


#멀고도 가까운#레베카 솔닛#후회#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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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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