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까지 달려온 방향을 바꿀 절호의 기회예요. 앞으로 남은 기간이라도, 그동안 (외환위기 이후) 20년 동안 무엇이 잘못됐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바꿔야죠. 저는 솔직히 현 정부가 더 좌파적으로 가야 한다고 보거든요. 단지 최저임금 몇천 원 올려서는... 이런 식이면 국민들이 추운 겨울에 나와 (문재인) 대통령을 뽑았는데, 바뀐 것이 없다고 할 거예요."
그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거리낌 없었다. 직설적 화법도 여전했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 인터뷰 도중에 그는 다소 아쉬워하는 표정도 지었다. 자신의 발언을 두고 정치권에서 당파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지난해 말 그는 또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 일부 보수언론의 지면에서 다뤄진 '국가비상사태'라는 자극적인 주장의 주인공이었다. 자유한국당 등 보수진영에선 현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를 장 교수의 입을 빌려 기정사실화하면서 여론몰이에 나섰다. 진보진영에서도 장 교수의 발언을 두고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대놓고 '혹세무민 말라'고 따졌고, <한겨레> 역시 장 교수의 주장에 의구심을 던지기도 했다.
지난 2003년 이후 15년 넘도록 그의 발언을 쫓아온 기자 입장에선 그의 발언 배경과 진위 등에 대해 듣고 싶었다. 장 교수와는 지난 2018년 12월 28일 오후 화상통화를 통해 1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몇개월 전인 2018년 8월 영국에서 장 교수와 만나 여러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지 4개월만이었다. 그에게 '이번에도 보수와 진보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계신다'면서 말을 건네자 "그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이어 "일부 매체에서 자극적으로 다룬 측면이 있지만, 그동안 해왔던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면서 "이야기의 맥락을 보지 않고 오해하신 분들이 계신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사실 세계적인 경제학자들 가운데 장 교수처럼 그의 발언을 두고 자국 내에서 논쟁이 크게 번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꾸준히 반대 입장을 취해온 그는 노동조합 강화를 비롯해 교육과 복지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또 기술과 연구개발에 대한 산업정책과 재정을 활용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도 주문해왔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그의 생각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면서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 보다 적극적인 재정정책과 복지확대를 주문했다. 지금 같은 어정쩡한 정책보다, '더 좌파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가비상사태? "이제 1년반 넘은 정부가 망쳤으면 얼마나 망쳤겠나"
- 얼마 전 일부 보수언론의 인터뷰 내용을 두고 정치권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나왔다.
"(쓴웃음을 지으며) 기사 제목에 나온 것만 보시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현재의 상황에 대한 생각을 말하면서 강조를 하다 보니까, 맥락을 살피지 않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 언론 입장에선 '국가비상사태'라는 표현 자체에 끌릴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제가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잘 알다시피 지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0년 동안, 정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경제사회 정책이 신자유주의 노선에 따라 추진돼왔다. 그렇게 20년이 지나보니 이제는 정말 경제, 사회적으로 우리 주변 결과들이 방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 보수진영에선 현 정부의 경제실패에 대한 '장하준의 경고'로 해석하고 있다.
"(고개를 저으며) 문재인 정부가 잘못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난번 연구실에서 만났을 때도 말했지만) 지금 정부가 들어선 지 이제 1년 반 조금 넘었는데, 경제를 망쳤으면 얼마나 망쳤겠는가. 그렇게 경제가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이 아니다. 최저임금 몇천 원 올리고, 무조건 돈 덜 쓴다고 해서 경제가 무너지는 게 아니다."
그는 이어 곧장 "지금 문제가 뭐냐면"이라며 특유의 어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의 말이다.
"아까 이야기한 대로 1997년 이후 20년정도 흘렀는데, 우리 경제산업정책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따라가고 있는 거다. 금융시장의 개방을 비롯해 노동시장 유연화, 산업정책의 폐기, 여기에 정부는 돈 안 쓰는 게 좋다는 식으로 자린고비로 재정을 운영하고... 그나마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제3의 길'을 추구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선 아예 대놓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했지 않은가. 정말 이대로 계속 간다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 그래서 '국가비상사태'라는 위기의식을 갖고 좀 더 적극적으로 해결하자는.
"그렇다. 기본적으로 저성장과 고령화 시대에서 이런 정책이 계속되면서, 출산율은 세계 최저에다가 자살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고...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스카이캐슬>이라는 드라마처럼 교육 문제도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지 않나.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을 통해 태어나지 않았나. 물론 경제정책이라는 것이 단시간에 바꿔서 성과가 드러나긴 어렵다. 하지만 그동안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파악하고, 궤도를 수정해서 제대로 된 방향을 제시해 가야 한다고 본다."
"유시민 선배, 존경했던 분... '혹세무민' 지적에 마음 안 좋아"
- 진보진영에서도 장 교수의 발언을 두고 말들이 나왔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혹세무민하지 말라"고도 했다.
"유시민 선배는 사실 저희 학생 때 민주화운동 리더 중 한 분이었고 존경하는 분이었다. (잠시 생각한 후) 그런데, 자신과 의견이 좀 다르다고 '혹세무민'과 같은 표현을 쓰는 것에는 마음이 썩 좋지 않다. 그런 식이라면, 옛날 군부독재시절에 정부와 조금 다른 얘기만 하면 '유언비어다', '좌경 논리다'는 식으로 몰아갔는데, 그런 것과 무슨 차이가 있나."
장 교수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 이어 유 이사장이 '대안을 내놓고 비판하라'는 지적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그는 "경제학자로서 실증 연구를 바탕으로 당연히 할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며 "내가 말하는 산업정책에 대해서도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야구 해설하는 사람에게 '너가 그렇게 잘 알면 직접 공을 던져봐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도 했다. 다시 그의 말이다.
"(한숨을 내쉬며) 아직까지도 산업정책을 이야기하면, 마치 과거 박정희 시대를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사실 제조업 등이 발달한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의 나라에서 산업정책을 추진한 것은 우파였지만, 그 내용을 보면 좌파 정책이다. 시장의 한계와 실패를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경제 동력을 키우는 거다. 또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사람들 많이 다치지 않게 정책적으로 도와주는 것, 이런 논리는 우파가 아닌 좌파 논리다."
장 교수는 "지금 보수 쪽에선 문재인 정부가 급진적이어서 경제가 망한다고 한다"면서 "하지만 오히려 현 정부가 너무 좌파 정책이 없어서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날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통해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복지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교수께선 그동안 복지에 대해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해왔다.
"맞다. 예전 노무현 정부 뿐 아니라 박근혜 정부도 '복지국가'를 구호로 내놓지 않았나. 그런데 최순실 국정농단이 터지고, 결국 또 구호로만 그치고... 보수 쪽에선 여전히 복지를 하면 나라 재정이 거덜 날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복지를 아직도 모르기 때문이다."
"보수는 복지를 아직도 모른다... 정부는 지금보다 훨씬 더 돈 써야"
- 에전에도 '복지는 투자'라고 말했는데.
"경제가 고도화되면서 노동자들의 재교육이 중요하게 됐다. 그러기 위해선 생활이 안정돼야 한다. 노동자들이 재교육을 통해 다시 일할 수 있다면, 개인과 나라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다. 문재인 정부가 진보정권이라면 재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OECD 선진국 중에 한국이 사실상 복지국가로는 꼴찌 수준이다."
- 2019년 정부 예산안을 두고도 자유한국당 등에선 슈퍼 재정이라며 반대가 심했다.
"훨씬 더 (예산을) 써야 한다. 정부가 재정을 엉뚱한 데 쓰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좀 전에 이야기했지만, 노동자 재교육뿐 아니라 의료, 탁아, 육아시설 등에 투자해서 획기적으로 바꿔놓으면 어떨까. 한국 여성들은 세계에서도 가장 우수하다고 하는데, 경력단절 등을 줄이면서 여성들이 더 잘 일할 수 있고, 노동자들도 더 진취적으로 일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는 여전히 재정 건전성에서 OECD국가 중 상위권에 속해 있는데, GDP 대비 복지지출이 10% 수준"이라며 "유럽 국가들은 25~30% 수준인데, 현 정부가 복지지출을 획기적으로 늘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장 교수의 말이다.
"오죽했으면 보수적인 OECD가 우리나라의 재정 건전성을 보더니 '돈을 더 쓰라'고 이야기를 하겠는가. 국내에선 정부의 지출에 대해서 무조건 나쁘다는 생각을 갖고 자린고비처럼 재정을 운영하고 있는데, 무조건 돈을 안 쓰고 갖고 있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생산적인 곳에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국민들이 피부에 느낄 정도로 복지를 확대해야지. 그것이 문재인 정부의 철학과도 맞다. 그렇지 않으면 추운 겨울에 광장에 나온 국민들 입장에서도 실망하지 않겠나."
- 그렇지 않아도, 현 정부 지지율이 2018년 연말에 40% 후반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지지층에선 보다 개혁적인 정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는데.
"이게 어찌보면 '제3의 길'의 한계다.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 최저임금 조금 올린다고 국민들의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쉽게 말하면 도로에 자동차들이 다니는데 교통신호등도 없애고, 교통규칙도 없애고, 운전 잘하는 놈만 빨리가도록 해놓은 것이다. 하지만 제3의 길은 그렇게 놔두면 교통사고 등으로 희생자가 나오니까, 병원도 만들고 보상금도 주자는 것이다."
- 제3의 길의 대표적인 인물이 영국의 토니 블레어 아닌가.
"맞다. 미국의 오바마도 비슷한 길이었다고 보면 된다. 어찌 보면 우리의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어떻게 됐나. 이들 미국, 영국, 한국 등의 정부가 모두 보수 정권으로 교체됐다. 제3의 길이 한계에 왔다는 것이다. 아까 비유처럼, 자동차 도로에서 단순히 교통사고 희생자를 돕는 것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교통법규 등 규칙을 제대로 세워서 그런 희생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
- '문재인 정부가 더 좌파적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제3의 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면 되는가.
"이미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해오면서 그 한계를 보고 있다. 또 다시 그 길을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당장 경제 산업정책을 획기적으로 바꾸기 어려울 것이다. 단순히 장관 한두 명 바꾼다고 되지도 않는다. 재정과 금융, 복지 정책 등 복합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현 정부 내에 어떤 결과물을 보기도 어려울지 모른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긴 안목으로 정책을 바꾸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것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기회가 남아있다고 했다. 그리고 "현 정부 지지율이 떨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믿음이 크다"면서 "지금까지 달려온 방향을 바꿀 절호의 기회가 있다"고 했다.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에 장 교수는 다시 "제3의 길을 극복하고, 한국식 새로운 길을 닦을 수 있다"고 했다.
"이제 문재인 정부가 40개월 정도 남았다. 3년 조금 넘게 남은 셈인데, (경제에서) 엄청난 성과를 내기란 쉽지 않을 거다.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복지에 중점을 두고 획기적으로 확대했으면 한다. 처음엔 (재정)적자가 나더라도, 국민들이 '복지가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라고 느끼게 해줘야 한다. 국민들이 복지에 대해 신뢰를 갖게 되면 아마 세금도 더 낼 거다. 복지가 단순 베풀기가 아닌, 국민과 국가 모두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해보라. 양극화 문제가 해결되고, 보다 평등하고 기회가 균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정말 새로운 길을 닦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