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금강산에서 다시 만나자
삼천리에 펼쳐질 통일 해돋이 마중 가자."
김송림 6·15 북측위원회 문예분과 위원이 두 손을 펼치며 구호를 외치듯 시를 읊었다. 남북 대표단 300여 명이 지난 13일 오전 해금강에서 떠오르는 해를 함께 바라보는 중이었다. 김 위원은 추위로 귀까지 벌게졌으면서도 내내 웃었다. 간밤에 잠을 설쳤다는 그는 "내가 관록 있는 시인은 아니지만, 11년 만의 만남에 격정과 흥분이 흘러넘쳐 시를 썼다"라고 말했다.
한반도기를 손에 쥔 남측 사람들이 "우리는 하나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측 관계자들은 "개성공단 열어보자"와 "금강산 모두 가자"라고 뒤따라 외쳤다.
"황영철 의원의 건배사, 볼 수 있습네까?"
올해 첫 남북 민간교류 행사가 '2019 새해맞이 연대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지난 12~13일 이틀간 금강산에서 열렸다. 6·15공동선언실천 남·북측위원회(이하 6·15 남·북측위) 차원의 공동행사는 11여 년 만이다.
2008년 6월 금강산 공동행사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이들은 "10년 7개월 만이다"라며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행사에 참석한 북측 관계자들은 "평양에서 4시간 거리를 달려왔다"라며 "이렇게 만나니 얼마나 좋냐"라고 웃어 보였다.
행사 첫날인 12일 오후에는 6·15 남북 해외위원장단, 여성, 노동, 종교인 등이 분야별로 모여 대표자 회의를 진행했다. 가장 주목을 받은 건 황영철 자유한국당 의원이었다. 2010년 5.24 조치 이후 보수정당 국회의원이 방북한 건 10년 만이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 민화협 회담에 참석한 북측 김영대 민족화해협의회(북측 민화협) 회장은 "우리 황 의원을 만나 반갑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지난해 11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 민화협 행사에 당초 참석하기로 했던 황 의원의 방북이 불발돼 아쉬웠다는 것.
김 회장은 "솔직히 말해서 (황 의원의) 이번 참여는 의로운 일"이라며 "민족 대의를 생각하고 시대발전을 해야지 여기서 뒤떨어지면 안 된다"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이어 그는 "옛날 과거에 어떤 일을 했든지 간에 정의의 길로 돌아서면 우리는 손잡고 나간다는 게 우리 공화국 입장"이라며 보수정당이 남북 교류에 더 많이 참여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비쳤다. 황 의원은 "사실 지금까지 남북 간에 통일교류를 이념적으로는 진보 진영에서 (주도)했다. 그러다 보니 보수에서 통일운동 하는 게 쉽지 않았다"라고 속내를 밝혔다.
이날 저녁 열린 연회에서도 황 의원은 마이크를 잡았다. 대표단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건배사를 발표한 인사였다.
황 의원은 "휴전선을 지역구로 두고 있는 황영철 국회의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평화통일의 꽃이 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방북을 결정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황 의원의 건배사가 끝나자, 북측 민화협 고위관계자는 기자에게 "자유한국당 의원이 오기 쉽지 않았을 텐데 어려운 결정을 했다. 황 의원의 건배사가 감동적이었다"라며 "건배사 내용을 메모한 게 있으면 보여달라"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황 의원은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지난번(2018년 11월 민화협 행사)에는 당 지도부가 방북이 적절하지 않다고 해 방북을 철회했다"라며 "이번 방북은 독자적으로 결단했다. 보수 정치인의 방북이 남북 교류와 통일 분위기를 진전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그는 "부질없는 방북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라며 "솔직히 이런 환대를 받으니 오늘은 기분이 좋지만 돌아가서 어떨지…"라며 옅게 웃었다.
교황 방북 어떨까? 북의 고민
행사에서 북측 관계자들은 남북 교류뿐만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북을 두고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북측 고위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 만나 "교황님 방북을 두고 공화국의 입장을 남측 관계자와 이야기했다"라고 밝혔다.
남측 고위관계자 역시 "'북의 고민'을 확인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북측은 교황 방북을 두고 초청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바티칸에서 지난해 10월과 올 1월 "북이 초청장만 보내온다면 방북할 수 있다"라고 밝혔지만, 북이 초청장을 아직 보내지 않은 건 이 때문이다. 북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만남을 두고 북 내부에서 찬반 의견이 갈린다는 것.
남측 고위관계자는 "교황님의 방북은 김 위원장이 추구하는 세계화와 비핵화에 중요한 계기가 될 거라고 북측에 설명했다"라고 말했다.
북의 초청장만 있다면 교황의 방북은 성사될 수 있을까? 바티칸에서 방북 자체는 긍정적이어도 교황의 1년 일정은 빈틈없이 짜여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교황의 11월 일정을 보면 가능성이 엿보인다.
남측 고위 관계자는 "교황이 11월 둘째 주에 일본의 도쿄, 히로시마, 나가사키를 방문할 계획"이라며 "북의 결단이 있다면, 거리상으로 일본 방문 후 북으로 가기 좋지 않겠냐"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살얼음 걷는 기분" 개성공단 관계자의 한숨
이날 남북 민간단체의 연회는 오후 10시 30분이 지나서까지 계속됐다. 이들은 11여 년 만의 만남을 기념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모습이었다.
이 자리를 반기면서도 착잡함을 드러내는 참석자도 있었다. 신한용 개성공단기업협회장은 <오마이뉴스>와 만나 "사실 북미 정상회담을 보름 정도 앞두고 하루하루 살얼음 걷는 분위기"라고 속내를 밝혔다.
개성공단이 폐쇄된 지 3년여가 흘렀지만, 개성공단 내 공장의 시설점검조차 하지 못한 상태로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신 회장은 "북미 정상회담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6일부터 2박 3일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할지 고민하고 있다"라며 "이번 기회가 아니면,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없다"라고 한숨을 내뱉었다.
이번 행사에서 남북은 '8천만 겨레에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했다. 이들은 호소문을 통해 남북 정상이 판문점선언을 발표한 4월 27일부터 9월 평양공동선언이 나온 9월 19일까지를 '판문점선언과 9월평양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활동기간'으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남과 북, 해외에서 선언 이행운동을 펼쳐나가자고 강조했다.
북의 관영매체 <조선중앙통신>도 연대모임의 개최와 호소문 채택 소식을 정했다. 14일자 <조선중앙통신>은 "북과 남, 해외의 대표들은 마음과 뜻을 합쳐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의 새로운 리정표인 북남선언리(이)행을 위한 성스러운 려(여)정에서 자기의 사명과 본분을 다해나갈 의지를 피력하였다"라고 보도했다.
이번 행사에는 이창복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상임대표 의장, 김희중 대주교 겸 한국종교인평화회의 대표회장, 지은희 시민평화포럼 고문,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 의장이 남측 대표단으로 참석했다.
북측에서는 박명철 6·15 북측위 위원장, 김영대 북측 민화협 회장, 강지영 조선가톨릭중앙협회 위원장, 양철식 민화협 부위원장, 김철웅 민화협 중앙위원 등이 대표단을 꾸렸다. 해외 측에서는 손형근 6·15해외측위원회 상임대표 의장, 김광일 6·15대양주지역위원장 등 15명이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