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줄을 타는 곡예사는 선배의 추락을 지켜보면서도 자신만은 안전하리라고 믿는다. 독재자들도 비슷하다. 숱한 독재자들의 비참한 말로를 보거나 듣고도 교훈은커녕 똑같은 길을 걷는다. 남의 나라 일만이 아니라 우리 현대사도 그랬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영구집권을 기도하다가 60년 3ㆍ15 부정선거로 쫓겨난 지 9년 만에 다시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정치학자인 새뮤얼 버틀러는 '권력은 마주(魔酒)'라고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전임자가 국민의 봉기로 권좌에서 쫓겨난 지 채 10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다시 장기집권을 기도하는 개헌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전혀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한 무지한 행동이었다.
67년 실시된 총선거의 6ㆍ8부정선거를 통해 개헌선을 확보한 박정희는 권력지향의 충성분자들을 동원하여 개헌에 대한 애드벌룬을 띄우기 시작했다. 7대 국회의원 선거는 3ㆍ15가 무색할 만큼 관권 부정선거였다. 개헌에 필요한 의석수를 채우기 위해 무리하게 부정선거를 감행한 것이다.
68년 12월 17일 공화당 당의장서리 윤치영은 부산에서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과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이같은 지상명제를 위해서는 대통령 연임조항을 포함한 현행헌법상의 문제점을 개정하는 것이 연구되어야 한다"면서 3선개헌의 물꼬를 텄다. 윤치영은 자유당시대에는 "이승만은 단군 이래의 지도자"라고 아첨을 하여 지탄을 받았던 인물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개헌문제가 야당의 강력한 반대에 못지않게 공화당 내에서도 JP(김종필) 계열의 반발에 부닥치자 일차적으로 '항명파동'을 통해 이들을 숙당하는 등 정지작업을 벌였다. 이런 과정을 거친 박 대통령은 69년 7월 25일 "여당은 빠른 시일 안에 개헌안을 발의해 개헌추진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라"고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박정희는 이승만과 똑같이 민주주의의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무리수를 던진 것이다. 7월 28일 공화당은 백남억 정책의장이 마련한 대통령의 3선연임 허용과 국회의원의 각료직 겸직을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 골격을 확정한 뒤 소속의원들에 대한 설득작업에 나섰다. 국회의원의 각료직 겸임 등은 악세사리일뿐 목표는 대통령의 연임 조항에 있었다.
개헌안은 공화당 의원 108명, 정우회 11명, 신민당 의원 3명 등 모두 122명이 서명하여 국회에 제출되었다. 서명과정에서 청와대ㆍ중앙정보부 등 권력기관이 총동원되어 JP계 의원들을 협박과 회유로 끌어들이고, 성낙현ㆍ조흥만ㆍ연주흠 등 신민당 의원들까지 변절시켜 개헌대열에 끌어들이는 '솜씨'를 보였다. 이승만의 수법보다는 많이 '근대화' 되었다는 평가가 따랐다.
그러나 당총재를 지낸 정구영은 끝까지 개헌안 서명을 거부함으로써 공화당은 107명이 서명했다. 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영입되었던 올곧은 법조인 출신 정구영은 권력의 갖은 위협에도 끝내 3선개헌 반대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민주회복 국민운동에 참여하였다.
신민당은 변절자들의 의원직을 자동 상실케 하기 위한 편법으로 9월 27일 당을 해산했다가 20일 복원시키면서 이 기간 동안 신민회란 이름의 국회교섭단체로 등록했다. 신민당 유진오 총재는 "3선개헌은 민주주의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이며, 이 다리를 넘어서는 날에는 평화적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되찾을 길이 영원히 막힐 것" 이라며 개헌저지 투쟁에 나섰다. 개헌반대 진영은 야당뿐 아니라 학생ㆍ문인ㆍ종교인 등 양심적인 다수의 국민이 참여했다.
30일 간의 공고기간이 끝난 개헌안이 9월 13일 국회 본회의에 회부되자 신민당 의원들은 표결저지를 위한 단상점거에 들어갔다. 이렇게 되자 이날 자정 이효상 국회의장은 "13일 본회의는 자동적으로 유회됐으므로 월요일인 15일에 본회의를 열 수밖에 없다"고 선포하고 본회의장에서 빠져나갔다.
신민당 의원들이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고 있을 때 광화문길 건너편 제3별관에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9월 14일 새벽 2시 30분, 공화당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이효상 의장의 사회로 단 6분 만에 개헌안을 변칙처리한 것이다. 국회주변 반경 5백m는 1천 2백여 명의 기동경찰이 엄중하게 통행을 차단하고 있는 가운데 개헌지지 의원들만으로 개헌안을 처리한 것이다.
그야말로 신종 쿠데타적 수법이며 역대 개헌사에서 가장 비도덕적인 개헌안의 처리였다. 부산 5ㆍ25정치파동, 4사5입 개헌파동에 이은 세번째의 변칙 개헌이었다. 박정희 집단은 합법적인 절차도 밟지 않고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권력욕만 충만했다.
공화당이 본회의장을 옮겨가면서까지 변칙적으로 개헌안을 처리한 것은 형식상은 야당의 단상점거 때문이라고 내세웠지만, 실상은 내부의 이탈표가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김종필계열 일부에서는 3선개헌을 반대하고 있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농성 중에 있던 신민당 의원들은 뒤늦게 변칙처리된 사실을 알고 현장으로 뛰어가서 가구와 집기 등을 마구 때려 부쉈다. 하지만 역시 기차 떠난 뒤의 돌던지기였다. 개헌안을 변칙처리한 이효상 의장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의장직 사퇴서를 제출하는 등, 여권은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냈지만 야당의 분노를 쉽게 달래기는 어려웠다.
개헌안의 국민투표를 앞두고 공화당의 지지유세와 신민당의 반대유세가 전국적으로 진행돼 국민적인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공화당은 "안정이냐 혼란이냐, 양자택일을 하자"고 내세우고, 신민당은 "개헌안 부결로써 공화당정권 몰아내자"면서 국민의 지지를 호소했다.
종교계ㆍ재야 등이 참여하는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어 개헌저지 투쟁에 나서고 전국의 대학생들이 궐기하는 가운데 10월 17일 개헌안의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투표율 77.1%, 최종집계 결과 총투표자 1,160만 4,038명 중 찬성 755만 3,655표, 반대 363만 6,369표, 무효 41만 4,014표로써 개헌은 확정되었다.
개헌안 국민투표 과정에서 정부ㆍ여당에 의한 각종 부정과 관권동원이 자행되고 투ㆍ개표과정에서도 무더기표 등이 발견되는 등 부정이 나타났다. 국민투표는 부정으로 일관된 하나의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개헌반대 투쟁을 일선에서 지휘해오던 유진오 신민당 총재는 9월 10일 뇌동맥경련증으로 몸져누우면서 국민투표를 이틀 앞두고 10월 15일 특별성명을 통해 "부정과 불법을 막아 개헌을 저지하기 위해 민권투쟁에 참여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개헌안이 압도적으로 통과되자 10월 19일 국민투표 결과에 대한 책임과 신병을 이유로 신민당 총재직에서 물러날 뜻을 밝히고 신병치료차 일본으로 떠났다.
3선개헌 반대 투쟁 과정에서 신민당 장준하 의원은 박정희 대통령을 "사카린 밀수왕초", "한국청년의 피를 베트남에서 팔아먹었다"는 등의 발언으로 대통령 명예훼손혐의로 구속되었다. 광복군 출신인 장준하는 일본군 출신 박정희의 헌정유린과 폭압통치에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이로써 박정희는 종신집권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이후의 역사가 보여준 대로 유신쿠데타와 긴급조치 등 더욱 철저한 헌정유린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는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자신이 만든 헌법을 장식물로 취급하였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