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의 상징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름만 바뀌었을 뿐 아직 공간은 그대로입니다. 현재 민주인권기념관 조성을 위한 다양한 연구용역 공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이에 맞춰 남영동 대공분실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 보는 글을 보냅니다. [편집자말] |
남영동 대공분실은 공포의 장소였다. 한때 누군가 남영동에 끌려가면, 멀쩡히 걸어서 나오는 법이 없었다. 잔혹한 현대사가 여기서 만들어졌다. 경찰은 박종철 열사를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고 갔다. 그리고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여기서 몽둥이와 군홧발로 조서를 꾸몄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 땐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공포 정치의 상징이었다. 한때 악질 경찰에겐 훈장 창고였다. 이곳에서 고 김근태 의원을 고문한 이근안은 1979년 청룡봉사상과 1981년 내무부 장관 표창, 1986년 옥조근정훈장 등 재직 기간에 모두 16차례 훈·포장과 표창을 받았다.
이근안을 발탁한 박처원은 남영동 대공분실의 총책임자였다. 영화 < 1987 >에서 배우 김윤식이 연기한 '박 처장'이 그다.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를 지시한 그는 '대공 경찰의 대부'라고 불렸다. 상훈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80년 녹조근정훈장과 1984년 홍조근정훈장 등 13차례 훈·포장과 표창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름 없는 수많은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이 여기서 고문을 당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악질 경찰은 죄를 창조한 대가로 훈장을 탔다.
이렇게 다른 기억이 서린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바뀐다. 국가폭력을 기억하고 인권의 가치를 되새기는 장소로 재탄생된다. 화합과 치유의 공간으로 오는 2020년 새롭게 문을 열 예정이다. 과연 남영동 대공분실은 한국판 홀로코스트 박물관(Museum of the Holocaust)이 될 수 있을까.
서울 용산구에 있는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민주인권기념관)에서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국회의원을 만났다. 표 의원에게 과거 경찰이 저지른 잔혹한 현대사를 물었다. 표 의원은 한때 경찰대 학생으로, 경찰관으로, 경찰대학 교수로 겪은 기억을 꺼냈다. '민주인권기념관'이 화합과 치유의 공간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도 물었다.
"경찰대 3학년 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보고 충격"
- 인터뷰 장소를 남영동 대공분실로 제안한 이유가 무엇인가?
"현장이니까. 직업이 경찰관이었고, 범죄 분석을 하면서 늘 현장에 가야 사건의 실마리가 잡히고 풀렸다. 성격은 완전 다르지만 과거 남영동 대공분실은 고문과 인권 유린의 장소였다. 여기서 목숨을 잃고, 고통을 받고, 극한의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린 분들이 있다. 이런 공간에서 이야기를 해야 가식적이거나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말할 것 같았다."
- 이곳은 경찰 고문의 상징이다. 남다른 기분이 들 것 같다.
"내가 85학번인데 박종철 학형이 84학번이다. 학번은 다르나 같은 또래다. 87년 경찰대 3학년 때 그 사건(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보도를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고 가슴이 아팠다. 내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다. 내가 누구고, 무엇을 해야 하고,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다. 같은 또래 친구들이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고통받고 피 흘리고 싸울 때 경찰대 학생으로 혜택받으면서 공부했다. 이 사실에 커다란 채무의식이 있다.
경찰관일 때 경기도 경찰서 외사계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외사계가 보안과 소속이라 보안 형사들과 같은 식구로 일했다. 고생하며 집에도 못 가는 그들의 피로한 일상을 봤다. 하지만 그들이 범죄자로 잡은 사람들은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아니었다. 우리 사회를 좀 더 나은 사회로 만들겠다고,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겠다고 나선 이들이었다. 그런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오는 것 자체가 마음이 복잡했다. 착잡하다."
- 남영동 대공분실에 얽힌 기억이 있다면?
"과거 인권 유린에 대한 단죄가 이뤄져 역사가 재정립됐을 때 경찰청이 이곳을 인권교육센터로 만들었다. 2004~2005년 즈음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다. (그때) 경찰관과 시민 대상으로 인권 강연을 하게 돼 처음 여기 오게 됐다.
그 당시 교육을 받은 경찰관들은 과거 인권 침해를 했던 경찰관이 아니었다. 그래서 강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왜 우리한테 이래', '만날 야단만 치면 의욕이 생기나' 이런 반발도 형성돼 있었다. 같은 경찰, 내부인으로 경찰관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권 강연을 해달라고 해서 내가 강연을 하게 됐다. 경찰관도 경찰 조직 내에서 상급자에게 인권 침해를 당하는 존재 아니냐. 시민의 인권이 보호될 때 경찰관의 인권도 존중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고문을 하거나 법을 어겨가면서 사실을 알아내고 증거를 확보해선 안 된다고 했다. 간첩이 아닌데 간첩으로 만드는 일도 범죄라고 했다."
"87년 당시 '저XX 짭새야' 몰매 맞기도"
- 본인에게 남영동 대공분실은 어떤 곳인가?
"빚쟁이다. 자꾸 빚 갚으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여러 사람들 덕에 편하게 민주화된 세상에 살고 있으니 뭔가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도 전두환 시절 같은 엄혹한 사회였을 것이다. 그래서다. 이곳은 빚쟁이다. 뭔가를 계속해야만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 87년 민주항쟁 때 경찰대 학생이었다고 했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는가?
"한 번은 연세대 앞 다방으로 친구를 만나러 갔다. 때마침 연고전이 벌어져서 그런지 스크럼을 짠 무리가 (연세대 앞을) 돌아다녔다. 내가 있던 다방에도 들어와 소리를 지르고 했는데, 스크럼을 짠 무리 중의 한 명이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나를 보고 딱 가리키더니 '야, 짭새다. 저XX 짭새야'라고 하는 것이다. 그 순간 그들이 나한테 달려들어 발로 밟았다. 소위 말하는 '다구리(몰매)'를 당했다. 그러다가 그 친구가 '그만, 사실은 짭새 아니고 경찰대 학생이야'라고 말하더니 무리를 끌고 나갔다. 그 다음에 그 친구를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한번 물어보고 싶다. 정말 내가 미워서, 나를 짓밟고 싶어서 그런 것인지. 경찰대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론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전·의경들도 대학생이거나 운동권 친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돌을 맞고, 쇠파이프로 맞고 자기 동료가 부상당하는 것을 봤다. 친구였고, 형제였던 사람을 적으로 대하는 현장을 직접 봤다. 그게 너무 힘들고 아팠다. 그때 우리는 똑같이 힘없고 가난하고 아등바등 어떻게든 살아가는 청년들이었다. 어느 쪽에 있느냐에 따라서 서로 적이 되어야만 했다. 그런 상황이 너무 서글펐다.
그때 다음 세대에는 제발 이런 세상을 물려주지 말자는 바람이 생겼다. 후배 경찰관들에게도 이런 고통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경찰로) 열심히 봉사하고 희생하면서 범죄와 싸우는데, 왜 욕을 먹고 비난 받아야 하나 생각했다. 반대로 좋은 세상 만들겠다고 민주화 운동을 하는데 범죄자 취급하고 처벌 당하고 고문까지 받았다. 이런 비극은 우리 시대에서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
- 남영동 대공분실을 떠올리면 고문과 조작이란 단어가 생각난다. 새롭게 태어날 민주인권기념관은 어떤 공간이 됐으면 하는가?
"딱 떠오르는 모델은 (독일의) 홀로코스트 뮤지엄(Museum of the Holocaust)이나 뉘른베르크 재판소, 나치 수용소였던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등이다. 모두 정말 끔찍한 비극이, 처절한 고통과 악이 난무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그걸 없애지 않았다. 후대에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록하고 기억한다. 사람은 소중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다. 기본 권리가 침해되면 안 된다는 걸 여기만큼 극명하게 가르쳐주는 곳은 없다.
이곳은 아름답게 치장해선 안 된다. 서대문 형무소와 마찬가지로 불법과 불의, 부정, 범죄, 악행의 흔적을 최대한 보존해야 한다. 그래야 그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묵직하고 무거울 수 있으나 그래야 미래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될 수 있다."
"아이들 걱정하는 그런 사람들이 왜 그리 잔혹했을까"
-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일어난 일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경찰 스스로 또는 외부 전문가들이 모여서 남영동 대공분실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연히 필요하다. 5.18민주화운동, 제주 4.3사건 등이 사건 중심이라면 이곳은 장소 중심이다. 사건 중심은 범위가 넓고 관련자도 산재해 있다. 세월의 흔적과 함께 현장 증거가 훼손된다. 그에 반해 이곳은 독립된 장소이다. 근무한 사람들이 대단히 한정적이다. 그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물어봐야 한다. 필요하다면 보호장치를 마련해 익명성을 보장해서라도 여기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돌아갔는지 조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나치가 600만 명을 학살했을 때 그 일에 가담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었다. 그들이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인류의 숙제였다. 이걸 알아내기 위해 예일대학교의 밀그램(Stanley Milgram) 교수가 실험했다.
밀그램 교수는 거리에서 임의로 선택된 다양한 나이의 일반인 43명에게 교사 역할을, 배우에게 학생 역할을 맡겼다. 교사 역을 맡은 일반인에게는 학생이 답을 틀릴 때마다 버튼을 눌러 15V씩 점점 강하게 전기를 가하게 했다. 놀랍게도 250V 즈음 왔을 때 버튼 누르기를 거절한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26명은 단 한 번도 끝까지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의 역할은 버튼을 누리는 것이라며 책임을 전가했다.
그래서다. 남영동 대공분실도 어떤 메카니즘이 작동됐는지 규명해야 한다. 그 당시 경찰관들이 다 악마는 아닐 것이다. 경기도 경찰서 대공분실과 남영동 대공분실은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마찬가지다. 내가 본 그들(경찰)은 참 착한 동료들이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집에 못 가서 걱정하고, 전화기를 붙들고 아이들을 걱정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로 하여금 범법과 범죄행위를 하도록 한 메카니즘은 무엇이고 그 정점에 누가 있었는지, 그리고 저항하거나 반항하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다 드러내야 한다. 피해자 관점에서 고문 행위에 대한 규명도 필요하지만 가해자 관점에서 그들(고문 경찰)은 누구였으며, 어떻게 해서 그런 짓을 했는지 규명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이게 규명돼야 시스템과 제도에 의한, 국가 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가해자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파괴당했다."
- 지난해 '국가배상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국가 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언제라도 배상 청구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법안이다. 왜 이런 법안을 발의했나?
"정원섭 목사님도 내게는 빚쟁이 같은 분이다. 1972년 내가 6살 때 (정원섭 목사는) 춘천 역전 파출소장의 어린 딸을 강간해 살인했다는 사건의 범인으로 몰렸다. 경찰에 고문을 당해 허위자백한 것이었다. 15년을 교소도에서 억울하게 있다가 가석방 형태로 나왔다. 주변에서 모든 사람이 이제 잊으라고 했으나 그 분은 그러지 않았다. 진실을 규명하고 명예를 되찾아야 한다며 싸웠다. 주변에서 '강대한 국가와 왜 싸우려고 하느냐', '그러다 또 당한다'라고 말렸지만 어린 아들이 겪어야 할 평생의 고통과 상처를 위해 싸웠다. 극악무도한 살인범의 아들이라는 사회적 오명을 씻어주기 위해서 홀로 싸웠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과거사 위원회(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조사결과 엉터리 수사였던 게 드러났다. 현장에서 발견된 범인의 체액과 정원섭 목사님의 혈액형이 달랐다. 애초부터 입건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빨리 잡아라' 호통치니 내무장관이 치안본부장에게 열흘 만에 잡으라고 지시하고, 다시 치안본부장이 강원도 경찰서 국장에게 '열흘 만에 못 잡으면 너 모가지야' 이렇게 해서 진짜 열흘 만에 잡은 것이다.
결국 이 사건 재심이 진행됐고 (정원섭 목사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당시 이 사건에 대해 글을 쓰고 언론에 공개하면서 (정원섭 목사와) 인연이 생겼다. 경찰에선 거의 유일하게 과거에 대한 반성과 정원섭 목사님 명예회복과 피해배상을 위한 국가의 특단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원섭 목사님이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해 1심에서 26억 원 배상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난데 없이 대법원에서 국가 배상 소송에도 소멸시효를 적용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양승태 사법농단과 연루돼 있는데, 딱 열흘이 지나서 (정원섭 목사는) 국가 배상을 받지 못했다. 어떻게든 도와드리고 싶어 개정안을 발의했다. 기재부(기획재정부)와 법무부도 설득하고 다녔으나 이 분(정원섭 목사) 한 사람만 아니어서 재정 당국이 상당히 곤혹스러워 해 아직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어떤 일을 했나?
"별로 한 게 없다. (지난해) 박종철 열사의 친구 분들, 선후배 분들이 가족들과 함께 '대공분실을 시민의 품으로 되돌려 달라'는 거리 서명운동을 했다. 그때 (내가) 함께할 거라 생각 안 했나 보다. 아무래도 경찰 출신이니 '경찰 편 아니겠냐' 이런 생각을 하신 것 같다.
근데 난 그렇지 않다. 옳고 그름이 더 중요하다. 더군다나 박종철 학형에게 개인적으로 혼자만이지만 빚을 지고 있다. 그래서 (서명 운동에) 함께했다. 당시 지하철에서 어르신들이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욕하며 소리를 질렀는데 그걸 다 받으면서 함께했다. 또 경찰청에 (남영동 대공분실을) 전향적인 사업으로 전환해 달라고 (국회) 상임위에서 질의하고 요구했다."
"국가 폭력 피해자들에게 잊으라고 하지 마라"
-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바뀌는지 아직 모르는 국민들이 많다. 더 많은 국민이 민주인권 기념관을 방문하고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다양한 홍보채널을 동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영화 < 1987 >이 상당히 흥행했다. 놀라운 게 지금 1020세대는 별로 관심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아들과 딸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우리 때 느꼈던 시대의 엄혹함을 모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보편적으로 느끼고 통하는 게 있다. 영화 < 1987 >과 연계한 다양한 홍보를 했으면 한다.
우리 세대에게는 조금 용기를 줬으면 한다. 용기라는 말이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단어다. 왜 그러냐 하면 경찰대학과 경찰관 출신으로서 이곳의 의미를 온전하게 받아들이는데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수많은 경찰과 공무원도 똑같을 것이다. 그 시대 '나는 이쪽 편이었어'라는 생각에 이곳을 멀리하고 무시하고 싶을 것이다. '난 잘 몰라'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일반 시민도 그렇다. 지난 2016년 연말에 촛불 혁명이 있었다. 연 인원 1000만 명이 촛불 혁명에 참여했는데, 반복해서 오신 분들을 빼면, 안 온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촛불이라는 것은 뭔가 조금 부끄러운 것일 거다. 그래서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고 굳이 거기에 관련된 것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남영동 대공분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오지 않았더라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고문한 사람과 고문받은 사람, 조사받은 사람과 조사한 사람이 모두 한 두 다리 건너면 친구이고 친척이다. 그 시대를 함께했던 우리가 모두 피해자다. 이제는 너나 따지지 말고, 그때 뭐 했니 묻지 말고, 우리 함께 더 늦기 전에 여기 오자고 해야 한다. 용기를 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공간이 돼야 한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한쪽에선 미래를 보자, 화합과 통합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왜 자꾸 과거를 들추냐고 한다. 상대방을 적으로 돌리고 단죄하려 한다고 한다. 이런 말도 듣고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과거를 묻어버리면 미래는 없지 않나'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잘못한 일을 온전히 밝혀내지 않으면 미래에 발생할 또 다른 잘못과 범죄를 막을 힘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30년간 범죄를 다루면서 몰랐다가 크게 깨달은 게 있다. 피해자들에게 잊으라고 하면 안 된다는 거다. 그것만큼 고문이 없다.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기억보다 어쩌면 더 아픈 게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이 잊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잊으라고 잊히는 게 아닌데. 손가락이 있는데 없는 것처럼 살라면 되는가.
온전한 진실을 밝혀야 한다. 누가 왜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그래서 도대체 피해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누가 그렇게 한 건지, 가해자는 이 모든 걸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미안한지, 그 미안함을 표현하고 책임을 졌는지, 다 드러나고 이뤄졌을 때 비로소 피해자는 미래로 나갈 수 있다. 무수한 피해자를 보면서 이걸 깨닫게 됐다.
남영동 대공분실만이 아니다. 4.3 사건과 여순 사건, 보도연맹 피해자는 더 심했을 것이다. 하나의 단일 범죄자가 행한 것보다 오히려 믿고, 기대하고, 의지하고 나를 보호해주리라 믿었던 국가가 범죄를 저질렀다. 그런데 어떻게 잊으라고 하나. 죄가 그대로 드러나고, 누가 했는지 밝혀내고, 그들에게 살아있다면 책임을 묻고, 죽었다면 그들이 한 행동이라고 그대로 알려야 한다. 그런 다음에 피해자를 쳐다보고, 피해자가 '그래, 이제 우리 미래로 가자' 이렇게 이야기해주면 그때 (미래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서로 서로 이야기를 듣고 외면하지 말고, 감추지 말고, 진실이 아무리 아프더라도 드러내자는, 그런 용기를 갖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