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의 상징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름만 바뀌었을 뿐 아직 공간은 그대로입니다. 현재 민주인권기념관 조성을 위한 다양한 연구용역 공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이에 맞춰 남영동 대공분실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 보는 글을 보냅니다. [편집자말] |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민간으로 이관되어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전면 개편된다고 한다. 만시지탄이지만 반가운 일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이 어디인가. '남산'(중앙정보부)이 그렇고 '서빙고동'(보안사)이 그렇듯 그곳은 흔히 '남영동'이라 불리며, 사람들이 사는 용산구 남영동 행정구역 전체를 음습하고 공포스러운 전제적 폭력의 장소로 환기시켜버린 바로 그곳이다.
1985년의 김근태 고문사건과 1987년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장소로서 이는 이미 영화 <남영동>과 <1987>을 통해서도 일반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이 두 사건 외에도 이곳은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에서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준 군부독재체제로 이어지는 20여 년 동안 수많은 민주인사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죄 없는 시민들을 붙잡아 고문하여 간첩이나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자라는 굴레를 씌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 국가범죄의 현장이다. 말하자면 냉전적 분단 독제체제의 대표적 재생산 공장 중의 하나였다.
내가 겪은 '남영동'
유감스럽지만 나와 같은 필부도 이 재생산 공장을 통해 반체제 불온인사라는 주홍글씨를 부여받아 평생을 그 굴레 속에서 살아오고 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권력을 잡은 전두환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0년 12월 16일, 당시 대학 4학년으로 마침 졸업논문 발표 날이어서 학교에 갔던 나는 학교까지 들이닥친 형사들에게 불법 강제연행을 당해 관할경찰서에 끌려갔다.
그리고 서울시 경찰청 공안분실을 거쳐 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삼십여 일 동안 불법구금 당한 채 고문과 협박 속에서 인간 이하의 모멸을 받으며 취조를 받은 끝에 계엄법 및 반공법 위반자가 되어 3년이라는 청춘의 시간을 감옥 속에서 보내야 했던 것이다.
내게 과연 3년이라는 징역형을 살아야 할 만큼의 죄가 있었을까? 내가 했던 '범죄행위'란 몇 명의 동료학생들과 뜻을 모아 광주시민학살의 주범 전두환 일당의 정체를 폭로하고 학생, 지식인, 시민들에게 그 범죄자에 복종하지 말고 맞서 싸우자는 내용의 선언문을 작성하고 이를 교내에서 살포한 것뿐이었다.
그것이 죄인가. 민주공화국 시민이 권력을 비판하고 이에 저항하는 게 범죄가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박근혜 탄핵집회에 참석했던 연인원 천만의 시민들도, 지금 태극기를 흔들어대며 연일 정부를 규탄하는 일부 시민들도 지금 모두 감옥에 들어가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불법쿠데타와 불법계엄으로 국가권력을 찬탈한 범죄자에 반대하는 의견을 발표한, 민주시민의 정상적 권리행사 행위를 중대범죄로 만들기 위해 진짜 범죄자들은 나를 비롯한 학우들을 용공분자로 만들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 불법연행, 불법구금, 불법고문을 저질러야 했다. 남영동은 바로 그러한 어처구니없는 비정상적인 일들이 정상적인 일과처럼 다반사로 일어났던 희비극의 무대였다.
왜 희비극인가 하면 지난 시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엄혹한 탄압과 감시 속에서 민주주의의 파괴자들과 맞서는 일은 어쩌면 생명을 걸어야 할 정도로 비장한 각오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잠 안 재우기, 무차별 구타, 관절 뽑기, 물고문, 전기고문 속에서 인간성 전체를 유린당한 경험은 지금도 악몽으로 되풀이되는 끔찍한 기억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 시대의 잘못된 집단적 광기가 빚어낸 한편의 희극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이 장소를 비극의 무대로 기억하기보다는 희극의 무대로 기억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 장소가 살인적 탄압과 필사의 저항이 충돌하여 비장과 숭고가 고양되던 비극의 무대로 기억될 경우, 이곳은 자칫 이른바 '민주화운동세대'의 역사경험을 특수화, 특권화하는 장소가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1970~80년대에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여 일어났던 민주화운동은 엄혹한 탄압에 맞서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비장한 투쟁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긴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민주국가, 민주사회의 건설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시민적 저항운동의 한국적 양상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 사회는 상당한 정도의 정치적 민주주의를 수립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반민주세력을 청산하기엔 여전히 역부족이었으며 경제민주화, 사회민주화로까지 심화, 확산되지 못한 미완의 운동이었다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그 얼마간의 투쟁과 성과를 특권화하고 이제는 그것을 자신들의 새로운 기득권으로 공고화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보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등지고 적대하기까지 하는 그 추진세력들이나 세대들의 오늘날의 행태를 보면 그들 자신이 또 하나의 적폐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모든 기념비는 한편으로는 기억의 불가역적 현실화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억의 박제화이자 과거화이기도 하다. 나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만드는 일을 환영하지만, 행여 그것이 지금은 새로운 시대의 민주적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신기득권 세력이 되어가는 이른바 '민주화운동세대'의 지화자찬의 나르시즘적 기념장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권력의 희극적인 광기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장소를 민주화운동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비극적 숭고의 장소로 기억하는 대신 기득 권력의 차라리 희극적인 광기에 의해 민주시민의 보편적 권리가 부정되었던 현장으로 기억하는 일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 누구도 이 땅에서는 자신이 빈곤하고 열악한 처지나 사회적 지위로 인해, 또 사회의 지배적 주류세력과 다른 생각이나 다른 삶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런 생각을 밝히고 실천에 옮겨 권력을 불편하게 했다는 이유로 천부의 보편인권을 유린당하거나 부정당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를 타자화하고 혐오하며 급기야 마녀사냥에 나서는 어떠한 광기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상식을 거듭 환기시켜주는, 과거를 향한 장소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장소로 태어나야 한다.
그리하여 이 장소가 돌과 나무로 만든 또 하나의 화석이 아니라 지금 현재 새로운 형태의 기득권과 광기에 의해 기본적 인권을 위협받고 있는 다양한 층위의 사회적 소수자들- 여성, 노인, 아동 청소년, 빈곤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난민, 성적 소수자-들의 권리를 위한 새로운 민주화운동이 시작되는 역동적 공간으로 설계되고 건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나와 같은 남영동의 비참한 고객들이 그곳에서 받았던 터무니없었던 고문과 폭력의 상처와 트라우마로부터 놓여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며 그렇게 되어야만 오명의 '남영동'은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의 성소로 자리매김되고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명인 기자는 인하대 교수, 계간 황해문화 주간으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