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의 상징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름만 바뀌었을 뿐 아직 공간은 그대로입니다. 현재 민주인권기념관 조성을 위한 다양한 연구용역 공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이에 맞춰 남영동 대공분실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 보는 글을 보냅니다. [편집자말] |
이미 수차례 남영동 대공분실을 방문했던 김순자는 1979년 삼척 고정간첩단 조작사건으로 이곳에서 12명이 넘는 가족들과 함께 모진 고문을 받은 국가폭력 피해자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에게 그날의 고통은 어제와 같이 생생하다. 그녀에게 민주인권기념관으로 거듭날 남영동 대공분실의 기억을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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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짜고짜 형사들이 잡아다 어디로 가는데 왜 잡아왔는지 아무도 말을 안 해줘요. 무슨 철문이 열리는데 쿵쾅 소리가 나더라고요. 그렇게 차에서 내리고선 몇 층인지 모르는 곳에 들어갔어요. 뭐 뺑뺑 돌아가는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몇 층인지 아나요."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그녀에게 대공분실은 현세의 지옥과도 같았다. 온 방에서 가족들의 신음과 수사관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그냥 자기가 맞으면 쓰러지고 그만인데 본인 앞에서 다른 가족들을 고문한다고 하니 뭘 해야 고문을 안 받고 가족들이 무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내가 일주일 늦게 들어왔는데 그동안 고문을 받아서 아버지랑 동생들이 다 쓰러져 있고 옆방에서는 비명이 다 들리고 너무 고통스러웠어. 고문 받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 같아. 차라리 나를 고문하지 내가 들어오니까 다른 수사관한테 다른 가족 고문하라고 시키고."
"아들이 이 방에서 아버지 비명이 다 들렸다고 하잖아"
가장 비극적이었던 건 친척이었던 진항식, 진형대 부자가 엇갈린 514호와 515호에서 함께 고문을 받으며 고통 받고 있었다는 거였다. 결국 진항식은 사형되었고 아들인 진형대는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중 이 황망한 소식을 들어야 했다.
"이쪽 방에는 부자가 고문을 받았는데, 아들은 여기서 고문 받고, 아버지는 건너편 방에서 받고. 아들이 이 방에서 아버지 비명이 다 들렸다고 하잖아. 서로 번갈아 가며 괴롭히고. 아이고. 억울해도 억울하다고 말도 못하고."
김순자도 비슷한 비극을 겪어야 했다. 남동생인 김태룡을 두고 수사관은 집요하게 김순자를 괴롭혔다. 일생 가본 적도 없는 곳에 갔냐고 묻는다거나, 그곳을 어떻게 갔느냐고 묻는다거나, 무엇 하나 답할 수 없는 물음에 가족의 생사가 걸려 있는 끔찍한 상황을 그녀는 기억한다.
"한 번은 수사관이 저쪽 방에 있는 가족이 내가 다대포에 공작금을 받으러 갔다고 진술했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안 갔다고 하니. 김태룡(남동생)이한테 가서 고춧가루를 주전자 물에 타서 코에다 부으라 하더라고. 그리고 전기 고문을 하라 이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갔다 왔습니다, 갔다 왔습니다, 했어. 그걸로 끝나는 줄 알았더니 대뜸 뭘 타고 갔다 왔냐는 거야. 나는 다대포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그랬더니 또 동생한테 고문하라 하고."
나중에 동생은 누나가 들어오고 나서 수사관들의 고문이 더 가혹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한번은 짬뽕을 시켜줬는데 건더기만 먹으라고 해서 먹고 내놨더니 나중에 사지를 묶고선 그 남은 국물을 코에 들이부었다는 말에 김순자는 자신 때문인가 싶어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다고 한다.
전기고문을 너무 많이 당해서인지 동생인 김태룡은 뇌진탕 때문에 복역 후에도 살아가는 데 너무 힘이 들었다고 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통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아픔은 그 날 뿐만 아니라 평생을 옥죄고 괴롭히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2014년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여전히 김순자에게 남영동 대공분실은 아직도 살아있는 악몽과 같다. 그렇기에 이곳이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시민의 품에 돌아왔다는 말을 들은 김순자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자신과 친척들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국가권력에 이긴 느낌이 이러할까. 그녀는 이 공간이 보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한복판에 고문하려고 건물을 지어놨다니"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와서 보면 이렇게 서울 한복판에 고문 하려고 건물을 지어놨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그런데 그 흔적을 다 없애버리면 이곳을 누가 지었는지,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잊어 버릴 거 아니에요."
타일 하나 벽돌 하나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서 국가폭력의 역사와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 비극을 우리 사회 공동체가 기억하고 성찰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에 마음이 묵직해졌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책임이라 하였던가. 그렇다면 이 공간은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의 책임이 뒤따를 때 비로소 민주인권이란 네 글자에 적합한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