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3#예요?"
"뭐라고?" 나는 단어가 정확히 들리지 않아서 되물었다. "아니에요." 학생은 퉁명한 말투로 거의 의자에 누운 자세로 툭 말을 던졌고, 어차피 수업에 잘 참여도 안 하는 학생이라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수업 진행에 바빠 그냥 넘어갔다. 수업을 한동안 하다가 어느 순간 그 말이 뭐였는지 조합이 됐다. '선.생.님. 메.갈.이.에.요?'였던 거다.
왜 나한테 저 말을 하지? 수업이 끝나고 수업 장면을 되돌아보니 글을 쓰라는데 딴짓을 하거나 짝과 떠들던 학생 몇 명에게 지적했던 게 기억났다. 우연히 그들은 모두 남학생이었다.
그렇다면 그 애는 내가 남학생들을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혼내는 사람으로 본 거였어? 어처구니없고 화가 났다. 뻔히 그 남학생들이 떠들고 딴짓하는 것을 제 눈으로 봤을 텐데 어쩜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이처럼 학교 내에서 교사를 교사로 보지 않고 여자로 보는 시선을 흔히 경험한다. 관리자가 그러기도 하고, 나이 많은 선배 교사가 그러기도 하고, 이번처럼 학생이 그러기도 한다.
7년 전 남고에 근무할 때였다. 수업 후 책상에 남학생 여러 명이 나와 여교사를 둘러싼 후 질문을 해서 정신을 딴 데 집중하게 하는 사이 한 명은 휴대폰으로 치마 속을 촬영하여 돌려보다가 그 선생님을 좋아하던 다른 학생의 신고로 덜미가 잡힌 일이 있었다. 여교사는 그 학생이 있는 학교에서 수업할 순 없다며 퇴학을 요구했고, 학교가 처리를 지지부진하게 끌자 2학기에 비정기 전근을 신청해서 가버렸다.
그 과정에서 여교사가 너무 어려서 과민 반응하는 거 아니냐는 말도 돌았고, 그래도 학생인데 반성하면 용서하고 잘못을 고칠 기회를 줘야지 범죄자 취급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는 말도 들렸다.
그때 나는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같은 여자로서 선생님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그래도 퇴학시키기보다는 제대로 가르쳐야 하지 않나 싶었다.
생각이 정리되지 못하는 사이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한 채 '남학교에서 치마는 정말 입지 말아야겠어'라는 어설픈 교훈을 얻고 끝나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범죄였지만, 학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중적인 여교사의 정체성
우리 사회에서 여교사의 정체성은 이중적이다. 교육에 대해 전문적 교육을 받아 권위를 갖지만 대놓고 남학생들로부터 남교사와 차별을 받기도 하고 교사라기보다는 여성으로 혐오, 무시, 깔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남자 선생님이 군대식으로 소리를 질러 손가락으로 까딱거리며 이리 오라고 하니 우다다다 뛰어와서 세상 공손하게 그 앞에 서는 남학생들을 볼 때면 저 애들이 평소 그 애들이 맞나 싶다. 교육학이고 뭐고가 아무짝에도 소용없어지는 순간이다.
학교의 문화는 가부장적 요소가 많다. 교사는 공식 업무 외에 가부장제를 등에 업고 당연하다는 식으로 부과되는 비공식 업무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흔하다. 외부에 수업 공개를 하거나 대외적 행사가 열려 외부 손님이 오는 날 다과 준비는 대개 여교사의 몫이다.
그날의 업무 분담에 교문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건 남교사에게, 교무실 구석 싱크대에서 과일과 차, 간식을 준비하는 것은 여교사를 대놓고 배정하기도 한다. 특히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교사가 과일을 깎고 있으면 둘러앉은 사람들은 예쁘게 깎네 아니네, 결혼하면 예쁜 딸을 낳겠네, 하며 평가를 한다.
그동안 근무했던 중고등학교의 남교장과 여교장 비율, 전체 교사 중 여교사의 비율과 부장 교사 중 여교사 비율을 비교해보면 학교가 얼마나 가부장적인지 일면을 알 수 있다. 예전보단 나아지고 있다지만 여전히 학교의 리더는 남자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고, 보조적 위치에는 여교사가 많다.
학생들에게도 이 문화는 그대로 답습되어 여학생은 부반장, 남학생은 반장 후보에 올리는, 지금은 믿지 못할 일들이 학교에서 자연스러웠던 때가 있었다. 소위 '학주'라고 불리는 학생부장은 특히 학교급을 가리지 않고 거의 남교사였고 지금도 많이 다르지 않다. 이유는 애들을 잡아야 한다는 건데, 왜 잡아야 하는지는 논외로 한다 해도, '잡는다'에는 강압적인 힘으로 누른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일이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학교는 올바른 것을 가르치는 곳이기에 더욱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최근 페미니즘 관련 이슈가 충격적 사건과 함께 터져 나왔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우리 일상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페미니즘 도서를 수업 중 학생들과 같이 읽고 토론하는 선생님들도 늘어나고 있다.
편견과 차별적 언어로부터 깨어나는 학생들
독서교육을 위한 추천도서목록 중에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영역이다. 목록은 관심 있는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함께 수업 중에 읽은 경험을 나누며 신중하게 만들었다. 신중하다는 것은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의 동의어이다. 실제로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는 수업을 고안한 선생님들은 여러 가지 두려움을 토로하였다.
50분의 수업 시간은 짧아 끝나도 논쟁거리는 남았는데 교사가 나간 교실에서 남은 여학생들이 준비 없이 자기들끼리 감당할 일이 두렵고 사례를 얘기하다가 남·여 학생 간 대결 구도가 되어 분노의 소용돌이로 이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실제 여학생과 선생님이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 사례를 공감하며 이야기하는 와중에 "김치녀들 클라스 좀 보소"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고 한다. '평범하고 착하던' 남학생의 이런 반응에서, 깊이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나왔다는 것에서 더욱 충격을 받았다는 수업 후기를 들었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두려움이다.
아직 학생들과 함께 읽기엔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선생님들도 많았다. 그런 경우 좋은 책의 목록을 공유하여 각자 읽고 교사인 나부터 제대로 알려고 노력하는 방법을 택한다. 책을 읽고 나면 나의 경험이 그냥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여자'라는 이름으로 '가부장제'라는 구조 속에서 겪게 되는 일임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이 인간 존엄을 얼마나 해쳐 왔는지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갖게 되고 표현해야 바뀐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까칠하다, 따진다'는 말을 듣는 것이 싫어 둥글게, 부드럽게, 쿨하게 보이려고 모르는 척, 대충 넘어가는 나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나'가 모여 가부장제 구조를 공고히 하는데 일조한다는 것, 조용히 넘어가면 조용히 묻힌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는 남성의 목소리로 속 시원히 문제를 얘기하고 있어서 훨씬 설득적이고 파급 효과가 크다는 책이다. <아빠의 페미니즘>은 경상도 남자로 태어나 기득권 버리기가 참 어렵고 반성을 많이 하게 되었다는 남자 선생님이 추천하였다.
스웨덴에서는 교육용 교재로 쓰인다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는 수업중 남녀의 차이가 의미심장하다. 남학생은 우리나라는 이 정도 차별을 받지 않는다고 했고, 여학생은 차별의 모습은 우리나 다른 나라에서나 비슷하다고 느꼈다는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학생이 '페미니즘은 여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함께 잘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는 글을 쓰게 된 책은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이다.
수업 후 서평을 받아보면 학생들은 뇌가 유연해서 그런지 좋은 책을 읽은 후 금세 편견과 차별적 언어로부터 깨어난다. 이것이 두려움을 이기고 조심스럽게 페미니즘 책을 학생들과 함께 읽는 의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