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입니다. 5월이라고 월급 더 주는 것도 아닌데, 지난달과 같은 예산으로 거사를 여러 번 치러야 하지요.
비용을 계산기로 두드려 봅니다. 양가 부모님께 용돈 20만 원을 드릴까 싶다가, 아파트 대출이 생각나서 5만 원 씩 낮춰 봅니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고마움 알면서도 화끈하게 쏘기는커녕, 주섬주섬 꼬깃꼬깃한 돈을 세어보다니! 어버이날, 부모님 용돈 계산하는 저... 인정머리 없나요?
이게 비단 저만의 고민은 아니었나 봅니다. 해마다 이맘때 즈음, 5월 지출에 대한 각종 여론조사가 줄을 이으니까요. 올해 여론조사 결과는 어떨까요? 취업포털 잡코리아에서 직장인 730명을 대상으로 설문했습니다. 직장인들은 어버이날 평균 27만 원, 어린이날 평균 13만 원을 쓸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론조사 결과를 모두가 똑같이 따라야 하는 걸까요? 가정의 달에도 현명한 지출 계획이 필요합니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용 창출하는 기업 윤리를 부모 자식 사이에 들이대는 것 같아 여전히 차갑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요. 가족 위한 고민이 어떻게 차가울 수 있겠어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5월 가계부 쓰는 손, 떨리지 않을 가성비 높은 가정의 달 보내는 방법.
가정의 달, 이 정도로도 행복할 수 있다
가정의 달, 용돈과 선물. 얼마면 될까요? EBS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멘토, <앞으로 5년, 빚 없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의 저자이기도 한 김의수 재무 설계사의 표현을 빌려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정의 달 지출액, '내 소득 기준 참조틀'에 맞춘 만큼이 딱 적정합니다.
'참조틀'이란, 소비를 할지 말지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예를 들면, '어린이날 나들이로 놀이동산은 입장료가 비싸니까 안 돼', 혹은 '동물원 정도면 우리집 수입에 가도 괜찮을 것 같아' 하는 생각입니다. 현명한 소비자는 우리집 소득에 맞는 지출을 합니다. 이건 가정의 달도 예외가 없지요.
5월 역시 번 돈보다 적게 써야 합니다. 고정지출(관리비, 대출 원리금, 공과금, 보험료, 교육비)과 생활비(식비, 생필품비, 의료비, 의류비, 여가비, 차량유지비)에 가정의 달 용돈과 선물을 모두 더했을 때 5월 소득을 넘어서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취업포털 잡코리아 설문 결과, 남들이 어린이날 지출로 13만원을 쓰는 것과 우리 집이 어린이날 적정 지출은 별개입니다. SNS에서 순금 카네이션 선물이 유행이더라도, 물건을 사기 전에 우리 집 소득을 한 번 확인해 보아요. 소비할 때야말로 욕망과
현실을 조율해야 할 날카로움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사지(buy) 말고 하는(do) 법, 이제부터 알려드릴게요.
① 집밥을 차리자, 모두의 힘으로
어버이날, 가족들 모두 모이면 집밥을 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집밥 좋은 거 누가 몰라서 안 하냐는 소리가 당장 들리는 것 같네요. 맞습니다. 우리는 알면서도 저렴한 비용으로 질 좋은 식사(=집밥)를 제쳐두고 외식을 선택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바깥 음식 사먹었던 이유가 게으름 때문은 아니었어요.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에요. 특히 집밥을 차리는 과정은 가정 내 권력 구도를 보여주는 태연하며 적나라한 시간입니다. 종종 거리며 밥 나르는 며느리'다운' 모습을 연출하다보면 울컥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집밥은 죄가 없습니다. 그래서 집밥을 이어 왔습니다. 남편의 인식의 지평도 조금씩 열리리라는 기대를 하면서요. 밥을 하며 저는 끊임없이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먼저 움직여줘. 같이 하자고. 그럼 나 일하는 거 전혀 힘들지도, 서럽지도 않아."
조곤조곤 얘기도 해보고, 울컥할 땐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갔습니다. 그럼에도 집밥을 하고 싶었습니다. 지루한 집밥 끝에 성역할 균형이 맞춰지길 바랐거든요.
올해 4월, 시부모님 생신을 치르기 위해 시가 식구 모두 모였습니다. 그리고 회, 소고기, 맥주, 과일 모두 더 해 20만 원 남짓 예산으로 2박 3일 집밥을 먹었습니다. 저는 매운탕을 끓였고, 시누이는 소고기와 버섯, 양파, 토마토를 구웠습니다. 어머님은 상차림 전반을 돌보셨고, 남편은 쌈채소를 다듬었습니다.
다 먹은 뒤, 다함께 뒷정리를 하고, 아버님은 설거지를 하셨지요. 같이 밥 하고, 그릇 치우는 게 뭐 대단한 거냐 하겠지만, 며느리인 제게는 달랐습니다. 함께 수다 떨며 식사 준비를 하고, 마무리를 하니, 집밥은 노동 아닌 유희였습니다.
"우리가 딸과 아들을 우열없이 동등하게 키웠듯, 며느리도 마찬가지 아니겠니. 다 똑같은 자식이야."
어머님이 무심코 던진 말씀을 마무리로, 집밥은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제 밥 하기 귀찮을 수는 있겠지만 서러울 일 없겠지요. 어버이날, 가족 구성원 인식의 지평을 넓힐 계기로 집밥을 추천해 봅니다.
② 손주표 카네이션과 그림책 편지
강원도 동해시에 사는 김재영씨는 올해 어버이날, 작년과 다른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바로 그림책과 아이들이 그린 카네이션입니다.
"가족에 대한 책을 읽어주면, 아이가 바로 말해요. 할머니, 할아버지 보고 싶다고. 그러니 가정의 달, 아이에게 필요한 건 그림책이라 생각해요. 정련된 언어로 가족애를 전달할 수 있거든요."
김재영씨는 앤서니 브라운의 <우리 엄마>, <우리 아빠가 최고야>, 로버트 먼치의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를 아이들과 함께 읽었습니다. 탄생에서 결혼, 그리고 다시 육아로 이어지는 삶의 순환을 로버트 먼치의 책으로 읽으면,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어린 애들도 육아하는 부모 마음을 헤아립니다.
"저희 부모님들은 자식들의 선물에도 흐뭇해하시지만, 손주들의 애정 공세를 더 좋아하세요."
다 읽고 나면 아이들이 그린 카네이션을 붙입니다. 조부모님들은 손주들만 보면 하늘에서 사랑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고 하던데, '우리 강아지표' 카네이션만 봐도 손주 생각 나시겠지요. 김재영씨가 그림책 편지를 택한 이유는 하나 더 있습니다.
"친정 엄마께서 책 읽는 즐거움에 푹 빠지셨어요. 젊은 날, 바쁘셔서 자주 못 보셨던 책을 손주들 그림책 읽어주시면서 애서가가 되셨어요. 그게 그림책 편지를 드리려 하는 가장 큰 이유에요."
무엇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는 딸이자 며느리인 그녀. '카네이션 꽃바구니' 소비라는 형식에서 한 발짝 벗어나니 진심이 훅 하고 들어옵니다.
③ 비싼 선물보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기
경상북도 구미시에 사는 박민지씨는 올해 어린이날, 아이에게 부모의 시간, 땀, 웃음을 선물하려 합니다. 다섯 살 난 딸에게 장난감은 흔합니다. 하지만 온전히 세 가족이 모이는 시간은 귀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딸을 관찰했습니다. 요즘 아이는 유치원에서 훌라후프 하는 시간이 제일 좋다고 들떴습니다. 박민지씨는 딸에게서 어린이날 실마리를 얻어 3천 원 짜리 훌라후프와 2천 원 짜리 탱탱볼을 준비했습니다.
"어린이날 선물은 꼭 크고 비싼 게 좋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아이의 필요와 흥미를 잘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해요. 비싼 선물보단 엄마, 아빠의 땀과 시간과 웃음을 선물해줄 거예요."
도합 5천 원 든 운동기구를 들고 구미시에서 마련한 어린이날 행사장에 갈 예정입니다. 작년 지자체에서 마련한 프로그램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풍선에 바람 불어 날리고, 킥보드를 탈 어린이날이 기다려집니다.
④ 매년 어버이날 용돈 10만 원이 가능했던 이유
하루 생활비 5천 원으로 5인 가족 살림을 꾸리는 주부가 있습니다. '가정경제 재무장관'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블로거 오미옥씨입니다. 그녀는 매년 어버이날 용돈을 10만 원으로 책정했습니다.
하루 생활비 5천 원으로 사는 그녀에게 10만 원은 큰 돈이지만, 평균 27만 원씩 쓴다는 남들 이야기에 자칫 위축될 수 있는 돈입니다. 그렇지만 오씨는 10만 원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형편에 맞게 지출이 가능했던 힘은 바로 부모님의 '인사' 덕분이었습니다.
"(행사 때 10만 원씩) 용돈을 드리면 저희에게 인사를 해주세요. '이 돈으로 친구들과 맛있는 밥 사먹었다', '다초점 안경 맞췄다, 고맙다', '애 셋이랑 아끼고 사느라 힘들텐데 고맙다' 덕분에 기죽지 않고 힘이 나요."
10만 원. 적은 돈이지만 오히려 따뜻한 말이 오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돈을 많이 쓰면 가족의 화창한 날들을 보증하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돈을 적게 쓴다고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가정의 달, 인맥 쌓는 달은 아니잖아요
그동안 고비용의 화려한 선물만 우수하다고 여겼던 건 아닐까요? 많은 돈을 들인 정성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소비하고 즐겨라'는 구호 반대편에 선 소박한 사람들의 단순한 삶을 초라하다거나 궁상이라 생각했다면, 편견을 뒤집어 보자는 겁니다.
'저비용'이란 말에 가려진 기묘한 현상은, 돈을 적게 쓸수록 소비 주체의 행복도도 낮아진다는 오해입니다.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이자,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 센터장인 최인철 교수는 그의 저서 <굿 라이프>에서 말합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소유의 영역에 살면서 비교하지 않으려고 결심만 한다. 행복한 사람은 애초부터 비교가 일어나지 않는 경험의 영역에서 살아간다.'
'소유의 영역'이란 줄 세우기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가정의 달 선물로 치자면, 누구네 아들은 어디 여행을 보내줬네, 내 친구 누구는 가족들하고 뭘 먹었네 하는 이야기들이지요.
반면 '경험의 영역'은 사람과 관계 맺으며 직접 몸 움직인 일들을 말합니다. 손주가 만들어준 카네이션을 두고, 누구네 손주는 고급 한지로 만들어줬는데 우리 손주는 색종이다, 이런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타인과 비교 불가 영역이지요. 행복한 가정의 달을 위해 필요한 건 '경험의 영역'입니다.
SNS와 미디어에 잘 드러나지도, 추켜세워지지도 않던 '검소하고 합리적인 가정의 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가정의 달이 인맥 쌓는 달은 아니잖아요. 가족은 결과에 부담을 느끼는 '관리 대상'이 아닌 '관계의 대상'이지요. 형편 맞는 소소한 나눔을 이해하고, 이해받는 따뜻한 가정의 달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