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광주에서 터졌지. 쌓아왔던 분노가. 그 사람들이 진실을 기록으로 들고 왔을 때는 내 입장이라는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
당시 서른다섯 엄마 윤정모는 1980년 5월 항쟁 직후 광주에서 탈출해 찾아온 박효선, 윤한봉을 외면할 수 없었다.
"1980년 6월 10일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해. 효선씨가 광주항쟁 기록 수첩을 비닐에 꽁꽁 싸 품에 안고 걸어서 서울까지 윤한봉씨와 함께 왔어. 한 6개월 우리 집에 같이 살았지. 오래 숨어있으면 걸릴 수 있으니까 돌아가면서… 홍석화, 정용화 등 7명 정도였을까? 꼬박 2~3년은 광주의 증언자, 현실의 수배자들과 함께 살았어. 너도 기억나지 않아? 화곡동 작은 방에 요강 하나 두고 숨어 살던 너의 삼촌들."
기억해보니 나는 삼촌이 많았다. 그냥 웬만한 남자는 삼촌, 여자는 이모라 불렀다.
엄마는 항상 글을 썼다.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66학번 윤정모는 글을 쓰지 않을 때면 낯선 사람들을 만났다. 녹음기를 켜고 메모를 했다. 아빠는 친가 쪽 가업인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새벽 경매 일을 했기에 육아는 엄마의 몫이었다. 외동딸이었던 나는 다섯 살 정도까지 엄마가 글을 쓸 때면 그녀의 발 옆에서 뒹굴뒹굴하며 놀았다. 그 이후 갑자기 삼촌, 이모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사실 내가 나서서 한 것도 아니야. 최권행씨가 나를 엮어 놓은 거지. 외모도 마르고 곱상했는데 치밀한 사람이었어. '연락 중책'이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숨거나 도망쳐야 하는 사람들의 은닉처를 담당했었어. 민청학련 당시 권행씨는 서울대 1학년이었지만 나이는 열아홉이었어. 고문도 많이 당하고 정말 고생했어."
실제로 최권행씨는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에 연루돼 내란음모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 고초를 치른 그는 37년 만에 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서울대 불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올해 퇴임했다. 당시 이십대의 최씨는 밤새 먹지에 긁어 유인물을 만들어 사람들과 나눠 명동과 같은 도심에 뿌리는 등 광주의 진실에 대해 알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내 상황이 만만했던 것 같아. 나는 그제야 위안부 참상과 친일잔재에 대해 눈을 떠가고 있던 시점이었거든.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에서 작가 윤정모는 대중작가에 불과했어. 그러니 당연히 그들의 블랙리스트에는 내가 없었겠지. 당시 박효선, 윤한봉은 항상 수배범 1, 2번으로 거론됐어. '두 사람이 잡히면 사형, 이들을 숨겨준 사람은 은닉죄로 7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고 매일 텔레비전에 나올 정도로 살벌했어. 그런데 그때 최권행한테 연락이 온 거야. 그로 인해 처음으로 광주에서 온 그들을 마주하게 됐어."
나는 그 엄혹했던 시대에 광주항쟁이 어떻게 지속해서 알려질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왜냐면 많은 일이 당시에는 중요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기억 속에서 흐려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때는 매체도 발달하지 않아서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직접 손으로 유인물을 만들어야 했다. 만남도 조심스러웠으니 많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광주는 어떻게 기억될 수 있었을까?
"외신에 다 떠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묻힐 수가 없었어. 아무리 전두환 정권이 광주 시민들을 '폭도'라 하고 관련자들을 구속하는 등 심하게 억압했어도 다행히 언론의 힘이 기억을 잡아냈어. 그리고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국민도 기억의 끈을 놓지 않았고."
5년 후인 1985년에 엄마 윤정모는 <밤길>이라는 소설을 통해 광주항쟁을 세상에 알렸다. <밤길>은 광주항쟁 당시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했던 김 신부와 시민군의 일원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요섭이 항쟁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서울로 탈출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김종욱 세종대 교수는 <밤길>에 대해 "광주항쟁을 본격적으로 그린 첫 작품이다, 작가는 광주항쟁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비극적인 투쟁을 지켜보기만 했다는 죄책감과 살아남았다는 미안함에 대해 속죄하고자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고 평했다.
박효선 "어두운 새벽, 조명탄에 낮처럼 밝아질 때 친구 윤상원이 항쟁을 기록한 수첩을 주면서 '네가 나가서 알려야 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바로 총 맞고 쓰러졌어요. 저는 그 수첩을 들고 몇 날 며칠을 걸어서 서울, 여기에 오게 된 겁니다."
"박효선씨가 참 그리워. 서글서글하게 웃던 모습이 참 선했는데. 연극을 좋아하는 문학도였지. 광주항쟁 당시 상황실에 끝까지 남아있던 사람 중 한 명이었거든. 그거 아니? 박효선과 윤상원이 친구였다는 것을. 둘 다 들불야학의 선생님이었어. 박효선씨가 잊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한 이야기가 기억나."
당시 엄마가 접한 것은 광주항쟁의 기록과 외신의 사진들이었다. 살점이 제대로 붙어있지 않은 시신들과 군인들의 잔혹한 학살은 어떤 환상이나 거대한 확신이 있지 않고서야 도무지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는 참을 수 없다는 생각에 소설로 광주를 알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소설 <밤길>은 금서가 되었고, 몇 년이 지난 1987년 6월 항쟁 즈음에서야 해금되었다. <밤길>을 보고 있으면 지금 내가 하는 시대의 고민을 꼭 짚어내는 구절이 이 있다. 어쩌면 엄마도 내 나이 즈음에 같은 고민을 한 걸까?
"신부님, 추기경을 만나고 수도 사람께 알리고 정부 요인에게 면담을 요청한다고 해서 어떤 해결점이 얻어질까요?"
"그건 나도 알 수가 없단다. 그래도 우린 가야 해. 가기 위해 출발했으니까."
- <밤길> 중에서
이명박·박근혜 시절에 힘들었던 억압과 많은 죽음들은 누구를 만난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부의 말처럼 출발했으니 그냥 가야만 하는 것일까. 지금도 글을 쓰는 엄마 윤정모씨에게 같은 질문을 했으나 시원한 답은 듣지 못했다.
"요섭아. 우리도 지금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고 있는 게 아니란다. 거기에도 장벽은 있어. 그 장벽을 깨뜨려 달라는 임무가 우리에게 주어진 거야. 우린 그걸 해내야 해. 행여 이 밤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해도 이젠 서둘러야 한다."
- <밤길> 중에서
어쩌면 35년 전 그녀가 <밤길>에 쓴 '끝이 없어도 해내야 하고 서둘러야 하는 일'들은 39년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밤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