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후 39년. 떠난 자는 떠난 자대로, 남은 자는 남은 자대로 여전히 그날의 진실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들을 만나본다.[편집자말] |
'139번 광수'로 지목된 여자가 있다. 광수는 '광주에 침투한 북한 특수군 부대원'이라는 의미로, 극우인사 지만원씨가 붙인 이름이다. 지씨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 600명이 침투했다며 당시 사진 속 인물들을 북한의 주요 인사 및 북한군과 연결지었다.
지씨의 말에 따르면, 139번 광수의 정체는 김정일의 첫째 부인으로 알려진 홍일천(김형직사범대학 학장)이다. 그런데 위 사진 속 인물은 북한이 아닌, 광주도 아닌, 땅끝 마을 해남에 거주하고 있다. 79세 노모 심복례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가 사는 곳은 내비게이션으로도 검색되지 않는 깊숙한 시골자락이었다. 그는 살면서 1980년 5월, 그때 처음으로 광주를 가봤다고 했다. 대체 어떤 사연일까. 지난 10일, 직접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해남으로 향했다.
79세 노모는 왜 '139번 광수'가 됐나
무성한 나무와 끝없는 논과 밭. 내비게이션을 따라 한참을 달려도 보이는 것이라곤 사람 하나 없는 시골길이 전부였다. '도착했다'는 안내가 나올 때가 돼서야 멀리서 키 작은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새빨간 장화 위로 군청색 꽃무늬 '몸뻬 바지'와 연보랏빛 상의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 쓴 창 달린 모자 아래로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이 보였다. 찾아올 사람이라곤 미리 연락한 기자밖에 없다는 듯, 여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언능 와. 나 논에 물 대러 가야항께."
세월 때가 한껏 묻은 장독대 여섯 개, 그 위로 주렁주렁 매달린 빨래들. 벽에 기대어 있는 흙 묻은 삽. 영락없는 시골집 풍경이다. 그를 따라 평상에 앉았다. 먼저 조심스럽게 '광수'로 지목된 그 사진을 내밀었다.
- 할머니, 이 사진 아시죠?
"나잖어. 사진도 어째 으스러하게(희미하게) 해놨다. 이게 광주(항쟁) 그때 찍힌 사진인 것 같드만. 난 찍힌 줄도 몰랐제. 정신도 없을 통인디."
- 이 사진을 '북한군'이라고 하던데요.
"알제. 광주 5.18(기념재단)에서 '어째 간첩으로 돼서 그라고 있냐'믄서 집으로 찾아왔더라고. 처음 얘기 들었을 땐 그냥 황당했제. 내 얼굴이 저기 있응께 무섭기도 하고. 시방 지만원 그 놈이 나를 어쩌자고 간첩으로 이어놨나 이해가 안가. 내 여서(해남) 평생을 살았당께. 여기서 나고 여기서 결혼해서 먹고 살고. 5.18 그때 남편 죽고 나서도. 그런데 뭔 염병한다고 나를 간첩이라고... 지가 뭐를 안다고."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방에 들어가자마자 낯선 풍경이 눈길을 끌었다. 벽에 걸려있는 젊은 남성의 흑백 사진이다. 누렇게 바랜 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
- 할머니, 이 분은 누구예요?
"내 남편이여. 이게 죽었을 때 갖고 있던 주민등록증 사진이여. 남편 사진이라곤 이거 한 장만 남았어."
"아들 하숙비 내러 갔다가 죽어부렀어... 봉변이제, 봉변"
- 아버님은 어떻게 되신 건가요?
"원래 광주 사람도 아니고, 여서 농사짓던 사람이여. 그때(1980년 5월)는 일일이 큰 아들 하숙비를 여서 광주까제 가져다줬어. 그때도 하숙비 땜시 광주로 올라간 거라. 그러다 변을 당했어. 봉변이제. 누가 그라고 죽을 줄 알았나..."
1980년 5월. 그의 남편 고 김인태(당시 47)씨는 장남의 밀린 하숙비 7만 5천원을 내기 위해 광주로 향했다. 당시 해남 시골자락에서 광주까지 올라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집 주변으로는 도로 하나 제대로 나 있지 않았다. 심지어 남편도 그렇고 할머니도 그렇고 '까막눈'이었다.
- 돌아가셨다는 건 어떻게 아시게 됐어요?
"나도 그렇고 우리 아저씨도 그렇고, 눈뜬 봉사여. 글씨를 몰라. 캄캄한 사람이여. 그래도 몇 번 광주 왔다 갔다 했응께 시간 걸려도 당연히 잘 돌아올 거라 생각했제. 그런데 남편 나가고 한참 지나서 전화 한통이 온 거야. 광주시청에서 온 전화였어.
내가 밭에 거름 주러 나갔나 그랬는디 (마을회관에서) 방송이 나오는 거야. 나보고 언능 마을회관으로 오라고. 뭔 일인가 해서 가니께 '김인태 사망'이라여. 그 다음날 오전 10시던가. 광주시청으로 오라데. 거기에 송장이 있다고... 얘기 들었을 때 그 자리서 주저앉아브렀어. 갑자기 온 전화가 애들 아부지 죽었다는 얘긴께. 이제 어째 살아야 허나 하고."
남편의 부고 소식은 그가 사망한 지 약 7~8일이 지난 후에야 닿았다. 남편은 1980년 5월 20일 광주 교도소 부근에서 사망했다. 이후 시민군에 의해 시신이 발견됐지만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후였다. 그럼에도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주머니에 든 주민등록증 덕분이었다.
"전화 받은 날 애들 새벽밥 해먹이고 바로 출발했어. 지금도 글치만, 여그는 차도 없고 배도 없어. 새벽에 째깐한 똑딱선(발동기로 움직이는 작은 배) 타고 목포로 간 담에 광주시청까지 갔제. 긍께 버스 태워서 망월동으로 데려가더만. (망월동으로) 갔더니 남편 관이 태극기로 덮여 있어. 관 아래로는 썩은 물이 뚝뚝 떨어지고. 이 사진도 그때 찍힌 거 같어. 관 안에 남편 보니까 이마 뼈가 갈라진 건지, 영 이상해. 그걸 봉께 이제 어떻게 애기들하고 살아가야 하나 걱정도 들고... 관 붙잡고 엉엉 울었제. 내 주변으로도 통곡소리가 진동했어."
남편의 사인은 '우측 두개골 압박 골절상'으로 인한 뇌 실질 손상이었다. 당시 사망진단서에는 진압봉 등으로 심한 구타를 당해 우측 두부가 골절된 것으로 기록돼있다.
- 어떻게, 아버님을 알아보실 수 있겠던가요?
"그래도 이녁식구(우리식구)라 알겄데? 얼굴은 못 알아보겠어도, 관만 떠들러봐도(떠들쳐봐도) 알겄더라고. 그렇게 망월동에 이장하고 그날 밤에 다시 차 대절해서 해남으로 내려왔어. 그때 광주 전체가 무섭드라고. 거리에 차도 없지, 여기저기 핏자국 나 있지. '어째야 쓰까'이라믄서 내려왔어. 돌아와서도 한동안 벌벌 떨었지."
남편 잃고 망가진 일상에 간첩 오명까지... "너무 한스러워"
'세상도 사람도 사랑도, 모두 변한다고 한다. 그래서 영원한 건 없다고... 그러나 누군가 말했다. 변한 건 없다고. 다만 무한할 뿐이라고. 인생도 삶도 죽음도. 다만 무한할 뿐이라고...'
남편의 묘비 뒤편에 새겨진 문구다. 할머니는 이 문구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는 "살아생전에 남편이 했던 말"이라며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벽에 걸린 남편의 사진을 꺼내든 할머니가 말을 이어갔다.
"내 나이 사십에 혼자가 되븐 것이여. 아들 넷에 딸 둘 낳아놓고. 나는 고놈들 전부 데리고 지금까지 혼자 살아왔어. 무자게 고생했제. 농사일도 그래. 밭일, 논일 다 혼자서 했어. 지금은 기계로 하지만 그때는 다 손으로 항께... 거지 돼부렀어.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그 많은 걸 혼자 다 할 수가 없응께. 남편 죽고 내 새끼들 제대로 키우도 못했어. 그런데 지만원은 이런 애먼 나를 간첩으로 지목한 거란 말이여."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2015년 10월 20일, 심씨는 5·18민주화운동 당사자 4명과 함께 지씨를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 혐의'로 광주지검에 고소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2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지씨의 8번째 공판에 참석해 증인 신문을 진행했다.
- 지난해, 서울에서 지만원씨를 만나셨죠?
"그랬제. 서울 가기 전부터 막 분이 나서 입 안이 다 불어 터졌어. 시방 법원에서 그놈 얼굴 보는데 어째 못하고 (화가 나서) 사지가 벌벌 떨리는 거여. 지만원한테 '신분 확인해서 나를 간첩으로 해놓은 거냐' 물으니 대꾸도 안 해. 내가 오죽 화가 났으믄 고소를 했겄어. 한국 사람이 어떻게 한국 사람을 간첩이라고 해. 신분도 확인하지 않고. 이놈들은 우리가 무능하답시고 그냥 간첩이라 몰아버린 거여."
3년 6개월이 넘은 지금까지도 재판은 진행 중이다. 16일에는 지씨의 10번째 공판이 열린다.
한편, 김용장 전 미군 정보부대 군사정보관은 13일 특별기자회견을 열고 "5.18은 계획된 시나리오였다"며 '북한군 침투설' 등에 대한 결정적 증언을 내놨다. 그는 "전두환의 광주 방문 목적은 '사살명령'이었다", "시민으로 위장한 남한 특수군을 격납고에서 직접 목격했다"며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마지막으로 '혹시 지만원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잘 배우도 못해서 말도 잘 못허지만, 부끄러운 짓 한 적은 없어. 아무 죄도 없는 사람 왜 간첩으로 몰아놨냐 이거여. 지금 내가 무식한 사람이라고 맘대로 간첩으로 몰아넣은 거 아니여. 그것이 아주 한스러워. 그때 내 얼굴도 못 본 놈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브렀어. 여기는 가게도, 식당도 없잖어. 남편 잃고도 이런 곳에서 한 평생을 살았는데 내가 무슨 간첩이여. 더 말하기도 싫어. 그렇게 알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