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도 내 맘대로 맞춤 주문하는 시대. 하나의 정답만을 강요하는 결혼 제도에 끼워맞춰 살아야만 할까? 좋은 것은 취하고 불편한 것은 버리면서 나에게 꼭 맞는 결혼 생활을 직접 만들어가려 한다.[편집자말] |
결혼에 대한 자조적인 농담이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 공유되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오늘 와이프 친정 간다'고 환호하는 메시지를 실수로 아내에게 보내 당황하는 남편의 반응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우스갯거리로 회자되기도 하고,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기러기 아빠' 같은 멘트에 빵 터지는 MC들의 모습이 공중파 방송에서 흘러나오기도 했다.
하기야 나도 결혼해서 남편과 함께 살다 보니 '우리'의 공간을 가끔 나 '혼자' 차지할 때의 홀가분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자유롭고 홀가분한 생활습관을 관철하는 것'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나 편안한 사람과 있다 해도 혼자일 때의 가뿐함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반면 한 집에서 결혼생활을 한다는 것은 나만의 공간에 다른 누군가를 초대해 그곳을 두 사람의 생활공간으로 바꾸어가는 일이다. 혼자일 때보다 불편하지만, 둘이라서 가능한 그 밖의 다른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일구는 변화다.
그래서 배우자가 집에 없는 상태를 반기는 태도가 재미로 소비되는 것이 나는 의아하다. 결혼을 통해 우리는 무언가 포기하고, 무언가를 얻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포기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고, 상대는 그의 자유를 침해하는 방해꾼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내 남편이 어딘가에서 그런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상상하면 조금 불쾌해진다.
두 사람이 한 집에서 산다는 것
나는 단체 생활을 좋아했던 적이 없다. 심지어 태어날 때부터 같이 살아왔던 가족들과 한 집에서 같은 규칙을 공유하며 부대끼고 지내는 것조차 버거워지기 시작했을 무렵에 나는 독립했다. 부모님의 집에서 살 때 '하지 말아야' 했던 것들이 사라진 대신에 혼자서 살게 되니 '해야만 하는' 일들이 생겼다. 그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함께 나누어' 하게 된 것이 결혼이었다.
남편은 결혼 전에도 내가 사는 집에 종종 놀러온 적이 있었지만, 그와 결혼해 한 집에서 사는 것은 부모님과 사는 것뿐만 아니라 나 혼자 사는 것과도 달랐다. 가정이라는 조직이 굴러가기 위해서는 두 조직원끼리의 협력이 필요했다. 연애할 때, 즉 각자의 집에서 살 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차이점들을 발견해야 했고, 때로는 고쳐나가야 했다.
결혼하면 치약 짜는 방법 때문에도 싸운다던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김치찌개 끓이는 방법부터 수건 개는 방법까지 다르다는 사실은 누구 한 명이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각자 다른 가정에서 자라났다는 증거였다. 한 사람이 또렷한 살림의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방식을 통일시키기보다 그냥 각자 하던 대로 하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한 집에 살기 위해 맞춰가야 할 것은 치약 짜는 방법만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습관이 다른 사람의 스트레스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방을 항상 깔끔하게 정돈하는 습관이 몸에 밴 남편과 달리, 나는 아직도 내가 쓴 컵을 바로 싱크대에 가져다 놓으려면 남편의 요구를 '의식해야만' 한다.
반면 옷가지를 침대 틈 따위에 쑤셔 넣어 '눈에 보이지 않게' 정리하는 남편의 습관은 언제 봐도 못마땅하다. 나는 옷이 먼지 쌓인 틈에 들어가 구겨지는 것보다 차라리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물론 바로바로 정리하면 된다는 최상의 해결책이 있긴 하지만.
사실 두 사람의 다른 생활 습관을 한 공간에 맞춰 넣는 행위는 결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친한 친구들 중 두 명은 3년 정도 함께 살았는데, 한 명은 어지르는 것을 잘 하고 한 명은 쉴 새 없이 바닥의 머리카락을 테이프로 찍어 내는 성격이라는 걸 같이 살면서 한층 실감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은 결혼은 물론이고 주거 형태를 정하기 전에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일까? 내 성향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거나, 상대방의 방식이 나를 힘들게 하지는 않을까? 내가 함께 살기로 결정한 파트너는 이 문제를 나와 함께 풀어갈 수 있는 사람일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누군가와의 결합일까, 아니면 혼자의 독립일까?
결혼으로 잃은 것과 얻은 것
혼자 있을 때 충전이 되다가도 어떨 때는 외로워진다. 사람들과 어울릴 때 즐겁다가도 어떨 때는 피곤해진다. 누구나 조금씩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 양쪽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을 선택했다면, 특히 그 방법이 결혼이라면 혼자 있는 시간은 비교적 줄어들게 될 것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모두 고요한 외로움을 즐기는 것은 아니듯, 결혼을 선택하는 모두가 일종의 '집단'을 꾸려나가는 데 소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르게 살아온 두 사람 사이에 기존의 교집합은 적을 수밖에 없다. 내가 해오던 방식을 포기하고 다시 새로운 집단의 규칙을 만들어 지키는 것은 혼자일 때보다 둘일 때, 둘보다 셋일 때 어렵기 마련이다.
우리가 공동생활을 위해 크고 작게 노력하던 것을 잠시 멈출 수 있는 순간, 즉 배우자의 한 사람이 장기적으로 집을 비우는 순간 놀랄 만큼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기도 하는 이유이리라.
그러나 그 감정을 배우자의 부재에 대한 기쁨으로 희화화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오늘 아내가 집 비워서 신난다'고 친구들에게 선포하거나 '주말 부부라 행운이다'라고 농담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들 스스로가 공동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에 대한 미숙함을 자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동거하고 있는 배우자가 나의 생활에 불편을 주는 요소라고 암시할 때, 그들은 상대방의 불편함 역시 자신이 느끼는 것과 동일선상에 놓고 생각하고 있을까? 함께 살기 위해 두 사람 모두가 독신의 삶을 비슷한 만큼씩 양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상대의 부재를 그렇게 간단히 한쪽에서 농담거리 삼을 수 있을까? 그 순간 독신의 자유 대신 선택한 배우자의 존재 의미는 너무 가볍고, 걸리적거리고, 별 중요치 않은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결혼이 주는 이점보다 독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불편이 큰 사람이라면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편이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독신의 자유보다 배우자와 함께하는 삶을 원했다면 상대방의 존재 가치를 우습게 만드는 농담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여전히 혼자의 삶을 사랑하고 동경하지만, 지금은 홀로 깨어 있는 어떤 밤에도 몇 걸음만 걸어가면 잠들어 있는 남편의 등을 끌어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좋다. 주말 내내 붙어 있다 보면 그가 어딘가 외출했으면 싶을 때도 있지만, 밤마다 결국 집에 돌아오는 배우자가 있다는 든든한 마음과 맞바꿀 만한 불편이다.
결혼이 어떤 종류의 체념이라는 듯한 농담을 던지는 대신에, 내가 선택한 삶 속에서 불편을 줄이고 더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의 가정을 만드는 한편 각자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의 결혼은 어떤 모양새를 갖춰야 할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정답은 아마 각 부부의 수만큼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cats-day)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