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책이 나왔습니다'는 저자가 된 시민기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저자가 된 시민기자라면 누구나 출간 후기를 쓸 수 있습니다.[편집자말] |
삶을 노래하면서 살림을 짓는 마음으로 이오덕님 책을 새로 읽어 보았습니다. 꿈을 그리면서 생각을 짓는 손길로 이오덕님 책을 하나하나 되읽었습니다. 사랑을 지피면서 책을 짓자는 꿈으로 이오덕님 책을 살며시 쓰다듬으면서 가슴에 품어 봅니다. (9쪽)
<이오덕 마음 읽기>(자연과생태, 2019)라는 책을 써냈습니다. 이 이름으로 책을 낼 생각은 진작 했으나 책은 2019년 7월에 태어납니다.
떠난 이오덕 어른을 돌아보면서 2003년에 처음으로 기림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2003년 8월 25일에 쓴 기림글이 발판이 되어 이해 9월 30일부터 무너미마을에 깃들어 어른 글자락을 되새기면서 갈무리하는 일을 여러 해 맡았습니다.
이동안 여러 가지 일을 치렀고, 갖은 사람을 만났는데, 이보다는 다른 여러 가지가 제 마음으로 찾아들었다는 얘기를 남기고 싶습니다. 어린이 마음을 받아들이는 어른으로 살면서 글자락을 여민 걸음걸이가 이오덕 어른이 살아온 나날이라고 느낍니다.
2003년 가을부터 2007년 봄까지, 이동안 무너미마을에 머물며 돌아보고 갈무리한 어른 글에서 흐르는 숨결은 언제나 '숲아이한테서 배워 숲어른으로 살아가고 싶은 사랑어린 슬기'였다고 느껴요.
1974년에 태어난 동시책 <까만 새>가 얼마나 팔리거나 읽혔는지 잘 모릅니다. 어쩌면 팔림새는 안 대수로울 만합니다. 모든 글하고 책은 사람들 가슴으로 스미느냐 하는 대목이 대수로울 테니까요. 글쓴이 넋이 읽는이 넋하고 만나서 새롭게 피어나느냐 하는 대목이 대수로울 테고요. (17쪽)
떠난 어른이 남긴 책이 많습니다. 어른이 손수 쓴 책도 많고, 어른이 손수 읽은 책도 많습니다. 떠난 어른은 처음에는 문학에 뜻을 두셨지 싶은데, 문학에서도 동시하고 동화라는 길로 나아갔고, 멧골아이하고 어우러지는 삶을 지으면서 '동시·동화'보다는 '어린이가 손수 쓰는 글'이라는 길에 눈을 뜨셨지 싶습니다.
어린이가 손수 글을 쓰는 동안, 어린이는 스스로 길을 엽니다. 어린이가 손수 그림을 그리는 동안, 어린이는 스스로 꿈을 그립니다. 글하고 그림을 스스로 제 삶자리에 바탕을 두어서 새롭게 지으니, 어린이는 언제나 활짝 웃으면서 새터 새마을 새나라 새누리 새삶 새사람 새사랑으로 나아갈 만해요.
이오덕님은 일제강점기에 아이들한테 일본말만 가르쳐야 했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는 아이들한테 일본말을 가르치는 일이 잘못인 줄 못 느꼈다고 합니다. 해방이 되고 난 뒤에야 참으로 크게 잘못했다고 깨달았고 뉘우쳤다고 합니다. (29쪽)
<이오덕 마음 읽기>라는 책은, 이 이름 그대로 '떠난 어느 어른이 남긴 마음을 읽자'는 뜻을 폅니다. 가르침을 읽는다거나, 배움을 얻자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을 읽자는 뜻입니다. 훌륭한 어른한테서 배우자는 뜻이 아니라, 멧골어른으로 살아가면서 고스란히 숲어른이란 빛이 되려던 걸음걸이를 어떤 마음으로 내딛었는가를 읽자는 뜻입니다.
시골에서도 숲어른이 될 수 있고, 서울에서도 숲어른이 될 수 있으니, 우리가 선 땅보다는 우리가 세우는 마음을 읽자는 뜻입니다. 높이 기릴 만한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하고 상냥하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신바람내며 뛰노는 어른이 되자는 뜻이기도 하고요.
이오덕님이 마지막 숨을 가늘게 내쉬고서 고요히 눈을 감은 돌집에서 이 글꾸러미를 매만지고 어르면서 날마다 생각했습니다. '나무처럼 산처럼'이란 무슨 뜻일까 하고요. 나무처럼 되고 산처럼 되겠노라는 마음을 담은 이름인 줄 얼핏 알겠으나, 그 뜻을 넘어 다른 이야기가 더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나(이오덕)부터 스스로 나무가 되고 산이 되려 하고, 내(이오덕) 이웃도 나무가 되고 산이 되는 길을 밝히고 싶다는 이야기가 있겠지요. 나무나 산이 되려면 어떠한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이 글꾸러미에서 밝혔을 테고, 나무랑 산이 함께 있는, 바로 숲이라고 하는 터전이란 어떤 자리인가를 이 글꾸러미에서 가만히 짚으려 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42쪽)
이오덕 어른이 '글짓기'라는 훌륭한 이름을 두고도 굳이 '글쓰기'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서 펴려고 한 뜻을 헤아려 봅니다. 어른이 쓴 책을 읽어 보면, 글을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느냐를 다루지 않습니다. 글쓰기를 하는 뜻을 다룹니다. 글을 쓰면서 어린이가 무엇을 마음에 담을 만한지를 밝힙니다. 글 한 줄을 쓰는 어린이가 어떻게 앞으로 꿈하고 사랑을 키워서 아름답고 즐거운 살림으로 씩씩하게 한 걸음을 내딛을 만한가를 차분히 들려줍니다.
<이오덕 마음 읽기>라는 책을 여미면서 열 갈래를 지어 보았습니다. 열 가지 책을 발판으로 삼아서 열 갈래 빛깔로 이오덕 어른 마음을 함께 읽자는 뜻을 펴려 했습니다. 굳이 책 열 자락만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스무 자락이나 마흔 자락에 이르는 이오덕 어른 책을 찬찬히 챙겨 읽어도 즐겁습니다. 그리고 애써 열 자락에 이르는 책을 읽지 않아도 좋아요. 열 자락 아닌 두어 자락이나 한 자락 책만 찾아서 읽어도 즐겁습니다.
떠난 어른은 어린이 글에 군말을 안 붙입니다. 오직 시골 아이 글만 줄줄이 보여 줍니다. 추운 겨울부터 새봄을 지나 여름하고 가을을 맞이하는 한 해 네 철을 가로지르는 이야기를 가만히 보여 줍니다. 눈물짓는 아이들 삶을 아이들이 손수 적도록 이끌어 줍니다. 웃음짓는 아이들 노래를 아이들이 스스로 활개치도록 북돋아 줍니다. 글쓰기란 이렇군요. 잘남도 못남도 없는 있는 그대로가 아름다운 글쓰기입니다. 오직 고운 사랑 한 가지로 마음을 가꾸는 길을 우리가 스스로 여는 글쓰기입니다. (68쪽)
저는 맨발로 풀밭을 걷기를 즐깁니다. 맨손으로 풀잎을 어루만지를 즐깁니다. 풀을 훑어 나물로 삼든, 풀을 베어 길을 내든, 언제나 맨손입니다. 옷도 가볍게 차릴 뿐더러, 민소매에 깡동치마를 두르고 풀일을 합니다. 뙤약볕이 내리쬐든 말든 해가림갓을 머리에 얹지 않고요. 모기가 물거나 개미가 기어올라도 맨살이 햇볕에 잘 드러나서 까무잡잡하게 거듭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맨발로 풀밭에 쪼그려앉아 맨손으로 낫을 쥐어 풀을 사그락사그락 베노라면, 풀포기가 저한테 말을 걸어요. "아, 시원하다!" 하고. 때로는 "네가 우리(풀)를 베어도 우리(풀)는 죽을 일이 없어. 왜 그런 줄 아니? 우리는 이 땅(흙)이 기름지도록 즐겁게 새로운 거름으로 돌아갈 생각이거든. 네가 맨손으로 날 만져 줘서 고마워." 같은 말을 들려줘요. 다만, 풀포기는 입이 아닌 마음으로 저한테 이야기를 들려줘요.
꽃 곁에 서서 눈을 감고 손가락을 뻗어 꽃잎을 만지면, 꽃잎은 파르르르 떨면서 "네가 내(꽃) 내음을 맡아 주니 얼마나 기쁜지 아니? 네가 마음이 부르도록 네 온 기운을 너한테 줄게!" 같은 말을 마음으로 들려주더군요.
아이들이 새로운 삶을 배우려 할 적에 대학교 아닌 길을 일러 주는 어른이 드뭅니다. 아이들이 새로운 사랑을 펴겠노라 할 적에 대학교 졸업장 아닌 길을 밝혀 주는 어른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어버이는 가르치는 노릇을 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모든 어른은 가르치면서 배우고, 삶을 삶답게 돌보는 구실을 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이오덕님이 그토록 많은 책을 쓰실 수 있는 바탕은 아이들한테 있겠지요? 늘 아이들한테서 배울 수 있는 마음이기에 새롭게 이야기를 지필 수 있었겠지요? 배울 수 있기에 어른이라고 봅니다. 배울 수 없다면 나이만 먹은 늙은이라고 봅니다. (81쪽)
떠난 어른은 흙이라고 하는 품에 안겼습니다. 2003년 8월 25일인데요, 그 뒤 한 달 남짓 지난 9월 30일에 저로서는 처음으로 어른 무덤자리에 가려고 멧길을 오르는 동안 숱한 멧새가 신나게 지저귀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어요. 저 멧새 가운데 어른 넋이 깃든 아이(새)가 있을는지 모른다고, 새는 스무 날이면 알에서 깨고, 바지런히 자라 어미 새하고 나란히 바람을 가르니, 이제 갓 깨어나서 숲을 누비는 어린 새 가운데에는 어른 넋을 품은 아이(새)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19년이라는 해에 <이오덕 마음 읽기>라는 책을 써냈습니다만, 2019년에 이 책을 내놓기까지 이오덕 어른을 헤아리는 글을 열일곱 해에 걸쳐 조금조금 써서 갈무리를 하여 조그맣게 한 자락으로 꾸몄습니다만, 저는 이오덕이라는 어른하고 딱히 이어진 끈은 없습니다. 저는 한국글쓰기연구회에 들어간 적도 없고, 그곳 교사나 모람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오덕 어른이 연 여러 모임에 들어간 일도 없고, 그곳 분을 거의 하나도 모르던 젊은이였습니다.
제가 걸은 길은 하나입니다. 저 스스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사랑다운 사랑을 해야 하고 살림다운 살림을 지어서 말 그대로 새롭다 싶은 새로운 길이 되려나 하고 돌아본 하루였습니다.
이런 하루를 살던 2001년 1월 1일부터 <보리 국어사전>을 짓는 편집장 자리에 앉았어요. 스물여섯 살 적입니다. 대학교를 그만두었으니 고졸이란 배움끈인데, 혼자서 한국말을 익히고 살아온 발걸음을 고이 여긴 윤구병님이 저를 떡하니, 스물여섯 살이란 나이인 젊은이를 사전 편집장 자리에 앉히셨지요.
이오덕님이 <무엇을 어떻게 쓸까>라는 이름으로 들려주려던 이야기란 바로 '우리 어떻게 살까'이지 싶습니다. '우리 어떻게 사랑할까'이면서 '우리 무엇을 노래할까'라고 느낍니다. 자전거를 달리는 동안 바람을 노래합니다. 두 다리로 걷는 동안 이 땅을 노래합니다. 아이를 안고 집살림을 건사하면서 기쁨을 노래합니다. 책 한 권을 읽고 글 한 줄을 쓰면서 사랑을 노래합니다. (92쪽)
이러다가 2003년 8월을 끝으로 사전 편집장 자리를 그만두기로 했는데, 이 자리를 그만두고 나서면서 원고종이 700쪽 부피로 쓴 이오덕 어른 기림길이 새로운 끈이 되어 이오덕 어른 큰아드님을 만났고, 어른 큰아드님을 만난 그날 '아버지(이오덕) 유고를 정리하는 일을 맡아 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글쓴이는 2003년 8월 25일에 기림글을 써서 >오마이뉴스>에 띄웠고, 이 글은 8월 27일에 기사로 올라갔다. 글쓴이는 이오덕 어른하고 아무 끈이 없었으나, 바로 이 글자락이 끈이 되어 이오덕 어른이 남긴 글을 갈무리하는 일꾼으로 지냈다.)
다시 말하자면, 저한테는 '배움꾼(가방끈·학력)'은 없었으나, '마음끈' 하나는 있던 셈이지 싶습니다. 내세울 '이름끈(명예·인지도)'마저 없었고요. 저는 그저 마음 하나로 한국말이 어떤 숨결인가를 읽으려고 살다가 사전 편집장이 되었고, 떠난 어른이 어떤 마음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셨나 하고 되새기면서 기림글을 쓰고는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하는 일을 맡은 셈입니다.
이오덕님은 고인 물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이러면서 우리한테도 '젊은이여, 그대도 늘 흐르는 물이 되게나'하는 뜻을 밝히려 했다고 느낍니다. 이오덕님 스스로 마흔 해에 걸쳐 조금씩 글손질을 이으면서 스스로 마음이며 몸이 거듭나는 살림을 보여 주니, 우리가 이 흐름을 좇거나 살필 수 있다면, 오늘 우리가 많이 어설프거나 엉성하거나 어쭙잖은 모습이라 하더라도 웃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아직 모자랄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이 모자란가를 똑똑히 안다면, 우리는 앞으로 스스로 거듭날 수 있으며, 오늘 우리가 무엇이 모자란가를 하나도 모르거나 등을 돌리고 만다면, 우리는 날마다 고인 물이 되거나 쳇바퀴만 돌 뿐입니다. (101쪽)
<이오덕 마음 읽기>라는 책을 쓴 밑뿌리는 오직 마음입니다. 오로지 마음입니다. 마음 하나 빼고는 이 책을 써낼 수 없었습니다. 다만 마음으로 어른을 뵈었을 뿐이에요. 마음끈 하나가 있는 줄은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 말고는 배움꾼으로도 이름끈으로도 책끈으로도 어른하고 이어진 일이 하나도 없었으니, 어느 모로 보면 갑작스러운 길인데,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면서 좋았습니다.
겉모습 아닌 속마음으로 바라보아 주니 좋습니다. 겉치레 아닌 속가꿈으로 나아가는 길을 함께 가면 좋겠다고 손을 내미니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좋다는 느낌'으로 끝낼 마음이 아니었어요. '좋고 싫음을 떠나는 마음'이 되기를 바랐어요.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글을 남긴 어른은 어떤 뜻이었는가를 읽고, 이렇게 엄청나다 싶은 책을 읽은 어른은 어떤 사랑이었는가를 읽으려 했습니다.
남들한테는 '겉보기로 유고 정리'일 테지만, 제가 무너미마을에서 맡아서 했던 일은 '속에서 흐르는 마음을 차근차근 짚어서 새로 펴는 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책 <우리 글 바로쓰기>에서 말하고 글하고 넋하고 삶이 하나로 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한 이오덕님 마음을 함께 읽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뜻을 세우고 갈고닦아도 모든 낡은 버릇을 털기까지 얼마나 마음을 제대로 쏟아야 하는가를 읽으면 좋겠습니다. 이 대목을 읽어 낸다면 '우리 말글을 바르게 쓰자'는 뜻을 내세우는 적잖은 책이 이오덕 님이 쓴 책하고 어떻게 다른가를 살필 수 있습니다.
이오덕님은 말만 번드르르하게 손질하는 길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민주·평등·평화를 외치면서 정작 말글은 민주도 평등도 평화도 아닌 지식인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일을 아무나 못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찬찬히 마음을 기울이되 서두르지 않으면 한 걸음씩 나아가면 할 수 있습니다. (135쪽)
이제 저는 <이오덕 마음 읽기>을 내놓으면서 이오덕 어른하고 맺은 수수께끼도 풀고, 어른이 저한테 준 마음빛도 제 손에서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제가 할 일을 해야겠지요. 이오덕 어른이 미처 마무리하지 못하신 '우리말 바로쓰기 사전'을 제가 새롭게 여미어서 엮을 수도 있을 텐데요, 저는 '이오덕 사전'이 아닌 '숲노래 사전'을 쓰는 길을 알맞게 가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곁님하고 사랑으로 낳은 두 어린이가 앞으로 사랑어린 숲사람으로 무럭무럭 자라도록 함께 길을 가는 어버이가 되면서, '아름다운 우리말'이 아니라 '즐겁게 사랑하는 살림을 짓는 슬기로운 생각을 숲에서 짓는 새로운 숨결로 나누는 말'을 이 땅 모든 이웃님이 같이 누릴 수 있는 사전을 쓰려고 합니다. 그동안 이런 사전을 몇 가지 써내기도 했습니다.
2014년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을, 2016년에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을, 2017년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하고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을, 그리고 <읽는 우리말 사전 1·2·3>을 써냈고, 올 2019년에는 <우리말 동시 사전>에다가 <우리말 글쓰기 사전>까지 써냈어요. 이듬해에는 <새로 쓰는 손질말 꾸러미 사전>을 선보이려고 요새 한창 추스릅니다.
시사용어나 전문용어를 뭉뚱그리는 커다란 사전이 아닌, 이야기를 알맞게 갈래지어서 단출하게 엮는 "읽는 사전"을 새롭게 씁니다. 앞으로 써내어 선보일 새로운 사전이 꽤 많습니다. 부디 이런 새로운 "읽는 사전"이 이오덕 어른이 멧새가 되어 노래하는 멧자락에, 숲그늘에, 무너미마을 한켠에, 나긋나긋하고 포근한 이슬방울로 띄워 보낼 수 있는 꾸러미가 되도록 애쓰려 합니다. 고맙습니다. 떠난 어른도, 살아서 노래하는 이웃님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글쓴이 누리집(https://blog.naver.com/hbooklove)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