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책이 나왔습니다'는 저자가 된 시민기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저자가 된 시민기자라면 누구나 출간 후기를 쓸 수 있습니다.[편집자말] |
'임나일본부'라는 말은 낯익으면서도 어려운 말이다. 국사 시간에 들어본 것도 같지만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게 현실이다. 가끔 TV 뉴스 시간에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를 다룰 때 단골메뉴로 등장하지만 일반인이 주요한 쟁점을 파악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그러다가 지난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의 권유로 북한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도서출판 말)라는 책을 펴내면서 이 문제가 일제식민사관의 핵심사항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일제는 조선침략 후 식민사학자들을 통해 주요하게 세 가지 역사왜곡 작업을 하는데, 첫 번째는 단군의 신화화, 두 번째는 한사군=평양설, 그리고 세 번째가 임나=가야라는 사이비학설이 그것이다.
중국 북경대로 유학을 간 리지린이 1961년경에 <고조선연구>로 박사학위를 따는데, 리지린 박사는 이 학위 논문을 보완해서 1963년 북에서 단행본을 출간한다. 이 책이 발간되면서 북한역사학계에서는 낙랑군=평양설(한사군=한반도설)은 거의 사라지고, 대륙고조선설과 낙랑군=요동설이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1966년 북한역사학자 김석형이 <조일관계사연구>를 통해 임나는 가야가 일본땅에 세운 소국이라는 '분국설'을 발표하면서, 식민사관의 양대 축인 일제의 임나일본부설을 뿌리째 흔들어 놓게 되었다.
조희승은 김석형의 제자로 김석형의 분국설(임나는 가야가 일본에 세운 소국, 분국이다)을 계승, 발전시켰고, 2012년에 펴낸 <임나일본부 해부>는 연구자가 아닌 일반인과 학생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쓴 책이다.
이 책의 제목을 알게 된 것은 2019년 4월 재미교포 아줌마 신은미의 북한여행기 <우리가 아는 북한은 없다>를 펴내면서다. 이 책에는 2013년 신은미씨가 평양에 갔을 때 안내를 담당했던 '조선국제려행사'의 리정 선생이 조희승 교수의 <임나일본부 해부>라는 책을 신은미씨 부부에게 선물하는 장면이 나온다.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를 읽으며, 임나일본부 문제가 한일 '역사전쟁'의 핵심임을 알게 됐는데, 북한 역사학자가 최근에 쓴 '임나일본부' 관련 책 제목을 보게된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서울 서초구의 국립중앙도서관 특수자료실을 방문해서 '임나일본부 해부'를 검색해보았다. 놀랍게도 <임나일본부 해부>는 개가식 서가에 꽂혀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복사 및 대여가 금지된 자료였다. 순수 역사물이 무슨 불온서적이라고 복사도 못하게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그날은 다음에 필사라도 해가리라 마음먹고 도서관에서 나왔다. 미국의 신은미 선생에게 북한여행기에 소개된 조희승 선생의 역사책을 출간하고 싶다라는 뜻도 밝혔다.
며칠 후 서울 인사동에서 역사 문제에 관심이 많은 J선생과 차 한 잔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이런저런 얘기 끝에 다음번에 '임나일본부'를 주제로 한 책을 내고 싶고, 북한에서 나온 <임나일본부 해부>라는 책이 있는데, 내용을 살펴보니 대중역사서로 남쪽에서 출판해도 괜찮을 것 같다라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그 분이 놀라운 얘기를 했다.
"그 책 나한테 있어요. 빌려드릴게요."
"아니 그 책을 어디서 구하셨나요?"
"미국에 갔을 때요."
"미국에서 <임나일본부 해부>를 샀나요?"
"아니요. 사실 미국 LA 갔을 때 신은미 선생 집에 방문했는데, 그 때 받았어요. 그 분들이 방북했을 때 선물받은 책인데, 고대사 문제에 관심많은 내가 보는 게 더 좋겠다면서 주셨어요."
"세상에, 이런 일이..."
얼마 뒤 J선생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온 <임나일본부 해부>를 받아볼 수 있었다. 약간은 흥분된 마음으로 광개토왕릉비 사진이 들어간 표지를 넘기자 손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신은미, 정태일 선생님들.
이 책은 저의 스승이신 조희승 선생님의 저서인데 제가 애호하는 책입니다. 비행장 통과의 여유시간에 여러 모로 편의를 잘 보장해드리지 못하였지만 좋은 추억을 간직해주시기 바랍니다.
2013년 8월 6일 평양에서 리정 올림"
평양공항-LA -서울, 약 20000km의 거리를 돌아서 손에 들어온 책이었다. 단지 한권의 책이 아니라 천년 동안 비밀스럽게 전승된 보검을 손에 쥔 기분이었다. 더구나 일본의 우익정권이 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꿈꾸며, '경제침략'을 노골화하는 시기가 아닌가. 임나일본부설(남선경영론, 남부조선지배론)은 일본 우익이 꿈꾸는 정한론, 대륙 진출의 이론적 기반이기도 하다. 일본과의 '역사전쟁'에 꼭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9년 7월 26일, 인쇄소에서 갓 나온 책을 들고 우체국으로 갔다. 우체국 국제특송으로 미국의 신은미 선생에게 <북한학자 조희승의 임나일본부 해부>를 발송했다. 신은미씨는 미국 시민권자의 방북금지 조치가 해제되면, 이 책을 들고 평양을 방문해 조희승 교수에게 전달할 것이라 한다. 책이 살아있는 생명체임을 느낀다.
북의 역사학자 조희승 선생은 <임나일본부 해부>를 왜 쓰게 되었는지를 '후기'에서 밝혔는데, 이를 소개하며 '임나일본부 해부'의 재탄생 뒷얘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일제가 왜곡 조작하여 조선침략과 조선민족말살의 리(이)론적 근거로 악용하였던 임나일본부설은 그 허황성, 비과학성이 낱낱이 까밝혀 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일본사회에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각급 력(역)사교과서들에서는 계속 종전대로의 반동적 임나설을 고집하고 있으며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과거 임나일본부설이 왜 나오게 되였(었)는지 또 그 위험한 독소가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고 있다.
이러한 실정은 필자 조희승(으)로 하여금 통칭 임나설이라고 부르는 이 사이비학설이 어떠한 사회력(역)사적 배경하에서 나오게 되였고 그것이 디디고 선 학술적 근거란 것이 얼마나 허황한 것인가에 대하여, 기비 가야국의 실체에 대하여 력(역)사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알기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글이 있어야 한다는 마음속 충동을 느끼고 이 글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남북경협뉴스> 9월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