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나이 앞자리 숫자가 바뀔 때마다 홍역을 앓았다. 특히 심했을 때가 서른아홉에서 마흔으로 넘어갈 때였다. 실연을 하고 직장도 잃고,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폐허 같은 현실 속에서 방황하다가 어디든 도망가고 싶었다. 그래서 10년간 회사 생활하면서 차곡차곡 적립한 비행기 마일리지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동유럽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비행기 안이었다. 영어도 잘 못하고, 장거리 여행도 처음인데 나 혼자 긴 일정을 감당할 수 있을까.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 막막함과 두려움 속에서 도망자처럼 시작한 동유럽 여행. 그 여행에서 내가 이고지고 간 모든 삶의 문제와 감정들을 잊게 할 만큼 나를 가장 압도한 것은 오스트리아에서 만난 클림트였다.

솔직히 나는 미술에 문외한이다. 그저 서울에서 유명한 화가의 전시회가 있으면 가보는 수준. 딱 그랬다. 클림트도 워낙 유명하다니까 벨베데레 궁전에 간 김에 가본 거지 딱히 클림트를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방에 들어가서 작품 앞에 선 순간, 발이 얼어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눈물이 나오기도 했다. 왜 그런지도 모른 채, 클림트의 그림들 앞에서 나는 전율했고 꽤 오랫동안 그 방에 갇힌 것처럼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림 무식자이니 어떻게 그림을 보고 말을 걸어야 할지 전혀 몰랐지만 그래도 너무 좋기만 한 행복한 서성거림이었다.

그때 처음 경험했다. 훌륭한 예술작품이 주는 위로와 힘이 있다는 걸. 실연 때문에, 불안한 현실 때문에 도망치듯 떠난 여행에서 내가 얻은 것을 하나만 고르라면 주저 없이 클림트였다. 난 귀국하자마자 내 생애 최초로 클림트 도록을 샀다.

내게 위로와 힘이 되어준 그림들

그 이후로 그림은 다 알고 보기보다 느끼는 것이라는 말에 완전 공감한다. 그래서 전시회에 가도 설명을 따로 듣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클림트의 그림들을 봤을 때처럼 스스로 소화할 수 있는 그림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데 있었다. 왜 사람을 저렇게 뼈만 앙상하게 그렸는지, 얼굴은 왜 무섭고 괴기스럽게 그렸는지, 왜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그렸는지, 별 그림도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유명한지, 당최 알 수가 없으니 재미가 떨어졌다.

간혹 도슨트의 설명을 듣기도 했으나 너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들으려니 집중력은 떨어지고 피로도는 높아져서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전시회를 나와서 관련 책이나 정보를 찾아볼 만큼의 열정은 없었다. 그냥 모르면 모르는 대로 보고 느끼자면서 봤는데, 더 알고 싶은 갈증은 더해졌다. 우연히 눈에 들어오는 작품을 본 경우에는 더했다.

어느 날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라는 그림을 인터넷에서 봤다. 클림트 때만큼은 아니지만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모니터를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그림이 주는 느낌도 재밌고, 사자가 등장하는데도 위협적이기는커녕 오히려 강아지처럼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상적이었다.

앙리 루소라는 화가에 대해서 처음 알았고, 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디에서 찾아봐야 할지 잘 모르겠고, 또 귀찮기도 해서 접어두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며칠 뒤, <오마이뉴스>에서 '앙리 루소'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눈에 확 들어왔다.

[연재기사 : 그림의 말들 보러가기]
 
 잠자는 집시(앙리 루소, 1897, 뉴욕 현대미술관)
잠자는 집시(앙리 루소, 1897, 뉴욕 현대미술관) ⓒ 뉴욕 현대미술관
 
"사자는 이 여인을 해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지켜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비현실적인 주제와 색감이 만나 신비롭고 동화 같으며 고요하다"라는 소개로 시작해서 '아무리 사나운 욕식동물도 지쳐 잠든 먹이를 덮치는 것을 망설인다'는 "부재를 읽고 나면 더 사랑스럽게 다가온다"는 구절을 읽으며 내가 그림을 보고 느낀 것이 그대로 담겨 있어서 반가웠다.

읽다 보니 그의 삶에도 매료되었다. 어쩐지 나와 닮아 있어서였다. 그는 평생 그림을 배워본 적이 없고, 세관원으로 일하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40세가 넘어서였다고 한다.

마흔 넘어서 새로운 일에 도전했던 경험이 떠올라서 루소의 삶에 이입이 되었다. 그때 나에게 가장 부족한 건 자신감이었다. 이 나이에 이렇게 몰라도 되나? 이렇게 서툴러도 되나? 이 정도밖에 못해도 되나? 내가 쓴 글에 자신이 없었고 그 열등감은 종종 나를 주춤거리고 위축시켰다.

루소는 달랐다. <잠자는 집시>를 그리고 만족스러워서 시장에게 셀프 추천을 했다는 대목에서 빵 터졌다.

"저는 스승 없이 독학으로 붓질을 배운 화가입니다. 제가 그린 그림을 한 점 추천하오니 부디 고향에서 구입해 소장하면 좋겠습니다. 추천작은 <잠자는 집시>입니다. 가능하다면 1800프랑에서 2000프랑쯤 받고 싶습니다. 부디 시장님의 호의를 기대합니다."

이 구절을 읽다가 "브라보~"했다. 어쩌면 밉상으로 보였을지도 모를 이 해프닝을 '셀프 추천'이라고 표현한 저자의 센스와 시각이 감탄스러웠다. 어쨌든 루소의 자존감이 부러웠고, 저자의 표현대로 그의 엉뚱함과 기발함에 무릎을 치며 속으로 외쳤다. '이런 매력덩어리였군요!' 이런 매력을 가진 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번의 사별을 했으니 말이다.

"두 명의 부인과 8명의 아이를 잃은 한 남자를 떠올려 보자. 묵묵히 살아내는 게 기적인 삶이다. 그런 그에게 그림마저 없었다면 어땠을까?"

한 인간이 겪는 불행과 그가 느낄 상실감에 대한 작가의 통찰과 따뜻한 시선에 나도 모르게 '그러게' 하며 맞장구를 쳤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 <잠자는 집시>는 비평가들로부터 조롱당하고 멸시당했다고 한다. 그를 유일하게 이해했던 후견인 극작가 알프레드 자리가 문학잡지에 기고한 글은 새겨들을 만하다.

"화가는 하나의 인격이다.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루소는 이상한 그림을 그린다. 우리가 모르는 그림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꼭 조롱할 필요는 없다. 규격에서 벗어나는 건 현대인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으면 몽땅 미친짓, 바보짓이라고 밀어두면 속 편하기 때문이다. 루소는 사회의 어리석은 편견의 제물이 되었다."

이렇게 한 편을 읽고 나면, 작품 하나 봤을 뿐인데 화가의 작품과 인생을 통해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내 과거가 소환되기도 하고,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사유까지 이어진다.

나는 내가 정한 규격에서 벗어난 사람들과 삶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갖고 있는지, 우리 사회에는 어떤 편견이 있는지조차 성찰하게 된다. 그러면서 내가 자꾸 그림하고 말을 하고 있었다. 뭔가 홀린 듯싶었다.

예술가의 인생을 만나는 재미가 한 권에
 
 다락방 미술관, 문하연 지음.
다락방 미술관, 문하연 지음. ⓒ 도서출판 평단
 
그때부터 <그림의 말들>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강렬한 첫사랑 같았던 클림트 이후 다시 그림들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2주에 한 번씩 나오는 연재 기사들을 보며 내가 몰랐던 화가와 작품에 대해서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지식으로만 알게 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만나는 것 같았다. 화가의 인생이 담긴 그림 이야기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까지 투영해 주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재밌게 읽고 있던 터라 올해 초 '그동안 <그림의 말들>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보는 순간, 멍했다. '이렇게 떠난다고? 말도 안돼.' 실연을 당한 것처럼 허전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림의 말들>이 <다락방 미술관>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읽었던 기사였는데도 다시 지면을 통해 읽으니 새로운 맛이 난다. 고흐, 고갱, 피카소 등 새로 추가된 내용들 역시 재미와 감동의 얼개가 탄탄하다.

저자는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순전히 자기가 좋아서 10년 간 공부를 하며 지식을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글을 읽으면 지식으로 머리만 채운 게 아니라 모든 작품이 가슴을 통과했다는 게 느껴진다. 화가가 겪은 불행에 가슴 아파하면서 함부로 고유의 삶을 재단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너무나 유명한 렘브란트의 작품과 삶에 대해 이야기꾼처럼 쭉 이어나가다가 그의 불행 앞에 잠시 멈춰선다. 당시 렘브란트는 너무나 사랑했던 아내 사스키아를 잃고 9개월 된 아들 티투스를 키우기 위해 들인 유모와 잠시 연인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랑의 크기가 클수록 사별 뒤 허전함은 배가 되는 법. 누구에게라도 맘을 붙이고 싶었으리라. 이런 마음을 여성 편력이라 부르고 지탄한다면 인간은 도대체 얼마나 강해야 하는 존재인가. 외로움이 넘쳐 숨쉬기도 힘든, 그래서 사랑이 절박한 사람 앞에 도덕이 무슨 소용."

이렇듯 화가에 대한 저자 특유의 다정한 통찰이 어쩐지 내가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래서 그림에 대한 책이지만, 그림 너머의 인생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해준다.

나는 어느새 나이 앞자리 수가 또 바뀌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지금의 나에게는 이 책이 10년 전 오스트리아에서 만난 클림트 같다. 나는 여전히 그림을 잘 모른다. 그런데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하나 있다.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는 것.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다락방 미술관 - 그림 속 숨어있는 이야기

문하연 (지은이), 평단(평단문화사)(2019)


#다락방 미술관#문하연 기자#그림의말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