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책 읽는 속도가 느린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유독 완독에 시간이 걸리는 책들이 있다.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눈물이 책장을 넘기는 장애물이 되거나, 하품이 장애물이 되거나. 심지어 한 달에 책을 열다섯 권쯤 읽는다는, 책 읽고 쓰는 일이 업인 금정연 서평가도 말했다. '눈물을 흘리며 책을 읽는 일은 힘든, 정말 더럽게 힘든 일'이라고.
임희정 작가의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를 읽으며 금정연 서평가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이 책은 임 작가의 첫 번째 책이자 산문집이다. 아나운서인 자식이 건설현장 노동자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의 뒷모습을 더듬어가며 쓴 글이 엮였다. 아무런 준비 없이 책을 펼쳤는데 세 번째 이야기부터 대책 없이 목이 메고 눈물이 새어나왔다.
휴지를 품에 끼고 눈물을 찍어내며 콧물을 풀어대면서 책장을 넘기는 일은 기예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울컥하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으면 하루 쉬고 다시 책을 잡았다.
초반에는 눈물 때문에 글자가 흐릿해 보일 정도였는데, 종반이 되자 오히려 차분해졌다. 책장을 덮고 나서는 따듯한 차가 담긴 머그컵을 양 손에 쥐고 있었던 것처럼 마음에 온기가 오래 머물렀다. 눈물로 시작해 온기로 끝내는 책을 읽은 게 퍽 오래간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 아닌 글로 실시간 검색어 1위한 아나운서
책의 저자인 임희정은 출판 전부터 글을 통해 놀라운 경험을 했다. 지난 2월 그녀가 용기로 쓴 '나는 막노동하는 아버지를 둔 아나운서 딸입니다'라는 글이 엄청난 화제가 돼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며칠을 머물렀다. 메시지와 전화가 수백 통 왔다고 하니 그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다.
나는 막노동하는 아버지 아래 잘 자란 아나운서 딸이다. 한글조차 익숙하지 않은 부모 아래서 말을 업으로 삼는 아나운서가 됐다. 내가 이렇게 잘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알게 모르게 체득한 삶에 대한 경이가 있기 때문이다. 매일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공사장을 향하는 아버지와 가족들을 위해 묵묵히 돈을 아끼고 쌀을 씻었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매 순간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쪽
그녀의 '나는 그랬다'고 꺼낸 한 마디가 실시간 검색어를 거쳐 사람들의 '나도 그랬는데'라는 이야기로 돌아왔다. '실검'에 오른 이후 그녀에게 메일 수십 통이 도착했다. 각자의 이유로 부모를 부끄러워했던 자식들이 그녀의 고백에 응답했다. 그녀는 이 시기 "글이 가진 힘을, 연대를, 희망을 보았다"고 회고한다.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까지 했으니 아무래도 가장 유명한 글은 '나는 막노동하는 아버지를 둔 아나운서 딸입니다'일 것이나, 그 글이 전부는 아니다. 임 작가는 실검 이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꾸준히 자신의 부모를 응시하고 사유해 글을 써냈다. 소재가 계속 쌓이고 글이 자꾸 쓰였다고 한다. 당연한 수순이다. 가장 큰 고민은 가장 좋은 글감의 다른 말이니까.
부모에 대한 생각은 그녀 인생의 가장 큰 숙제이자 고민이었다. 마구 엉켜버린 실타래 같아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러다 글쓰기 수업에서 가족을 주제로 글을 쓰게 됐다. 그녀는 평생 첫차를 타고 출근해 50년 넘게 막노동을 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아버지의 삶을 담아낸 글을 보고 선생님은 <오마이뉴스>로 보내보라고 독려했다.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임희정은 아나운서가 아닌 작가로서 생의 꼬인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내기 시작했다.
자기연민 없이 가난을 말하기란
책은 아빠 이야기, 엄마 이야기, 그리고 나의 이야기 순으로 진행된다. 막노동을 하며 일생 성실하게 살아오신 아버지를 만나고 나면 이제 어머니를 만날 차례다. 가정주부로 부업을 하면서 악착같이 살림을 꾸려낸 엄마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가 비슷한 중량감으로 다가와 반가웠다. 아버지의 노동만큼 어머니의 살림도 경이롭고, 어머니의 사랑만큼 아버지의 헌신도 위대하다. 이런 부분까지 세심하게 살핀 것이 고맙다.
그렇다고 책에 담긴 이야기가 마냥 처연하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녀는 평생 근면했지만 가난한 부모를 보며 노동과 사회구조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생계와 삶이 걸린 문제들은 배려와 행정으로도 풀 수가 없다. '작업시간 단축' 딱 거기까지만이다. 그 단축시간만큼 줄어드는 일급까지는, 그 일을 생업으로 하는 노동자 외에는 미치지 않는 생각일 것이다. -42쪽
누구보다 열심히 정직하게 노동을 했음에도 왜 평생 가난했고, 가난하고, 가난할 삶을 살아야 하는지 나는 항상 의문이었다. (중략) 단순히 무지했던 아버지의 배경 탓으로 돌리기에도 나의 아버지는 너무나 열심히 노동했다. -152쪽
자신을 연민하지 않고 가난을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나의 사정을 까뒤집어 보이면서 약해지지 않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는 과거를 미화하지 않는다. 그땐 힘들었지만 지금은 지나고 보니 아름다운 추억이라며 적당히 대충 봉하지 않는다. 이 책이 가장 돋보이는 지점이다.
작가는 속 깊이 감춰두었던 부모의 이야기를 꺼내놓은 뒤 말한다. 노동자를 바라보는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한 이야기가 쓰여야 한다고. 나 역시 일용직 노동자의 딸로서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다 괜찮아지는 그날'이 올 때까지, 모든 노동자와 그들의 자식들에게 널리 읽혔으면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