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의 동학혁명은 조선 봉건제 해체사의 최종적 도달점이며 또한 근대 민족 해방 투쟁사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서, 우리 근대사에서 하나의 커다란 전환기가 되었다. 그 중심부에 김개남 장군이 있었다.[편집자말] |
만일 조선사에서 반역아를 모조리 베어버린다면 발랄한 기백이 그만큼 사라질 것이요, 따라서 뼈 없는 기록이 되고 말 것이다. - 호암 문일평, 〈역사상의 기인〉
함석헌의 표현대로 "상투 밑에 고린내 나는" 조선왕조 500년 말기에 그나마 전봉준과 김개남ㆍ손화중 등이 있어서 '뼈 없는 기록'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들은 조선말기 척박한 이 땅에서 토우인(土偶人)과 같은 존재로 태어나서 무너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렸으나 그 바퀴에 깔린 불우한 혁명가들이다. 무릇 대부분의 혁명가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리지만 자신의 핏자국으로 거기에 새로운 길을 내는 사람들이다.
이들도 그랬다.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들"이다. 압제와 수탈로 얼룩진 조선사회의 '전통'을 깨부수고 분연히 일어선, 비범한 범인(凡人)들이었다. 그들이 태어난 골짜기와 지평선을 한 번도 넘어본 적이 없는 무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처음에는 부패한 관군과, 나중에는 현대식 병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항일전에서 15~20만 명이 죽었다.
'반봉건'과 '척왜척양'의 기치는 그 시대 상황에서 의열장부라면 마땅히 들어야 할 시대적 가치였다. 그것을 '잘난' 양반들이 모두 몸을 사릴 때 그들이 일어섰다. 반봉건이 이들의 첫 주장이라면 척왜척양은 그들이 남긴 마지막 뜻이었다.
이들은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아픔을 자신의 상처로 껴안으면서 농민군을 이끌고 동학혁명을 주도했던 영웅들이다. 그러나 부패한 봉건지배층과 틈을 노리다 침입해온 일본군의 현대식 병기 앞에 무참하게 쓰러졌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의 봉건체제와 대립하여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은 개항 후 그 모순이 집중적으로 심화되어온 삼남 지방을 토대로 크게 발전하였다. 동학혁명은 조선 봉건제 해체사의 최종적 도달점이며 근대조선 민족해방 운동사의 본격적인 출발점이다.
그 주동자 중의 하나인 김개남을 알기에 앞서 동학이 태동하게 된 역사적 배경부터 살펴보자.
첫째는 18세기 이후 변질된 조선왕조 양반사회의 정치적 모순, 둘째는 삼정의 문란, 셋째는 19세기 이후 서세동점의 위기 속에서 국가보위의식의 팽배, 넷째는 전통적인 유교의 폐해에 따른 지도이념의 퇴색, 다섯째는 서학의 도전을 민족적 주체의식으로 대응하려는 자세, 여섯째는 실학에서 현실 비판과 개혁 사상에 영향 받은 피지배 민중의 의식 수준 향상과 높아진 자각도 등을 들 수 있다.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사상은 유교의 인륜, 불교의 각성, 선교의 무위가 접화군생(接化群生)하는 천도사상을 말한다. 천도사상의 중심 개념은 인내천, 즉 천인합일 사상으로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고(事人如天), 억조창생이 동귀일체(同歸一体)라 하여 계급제도를 부정하며, 인간평등을 주창하는 인존사상을 종합한다.
이런 동학사상을 전봉준과 김개남 등이 사회혁명 철학으로 내세워 개항 이래 외래 자본주의의 침투에 의한 반식민지화와 국내 봉건적 관료층의 수탈로 신음하는 피압박 민중의 해방운동과, 반봉건ㆍ반외세 투쟁을 위한 이념으로 정립하였다.
동학혁명은 1894년 전라도 고부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미곡 징수와 만석보의 수세징수가 농민의 원성을 사게 되자 전봉준ㆍ김개남ㆍ손화중 등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봉기함으로써 발발하였다.
동학군은 <창의문>에서 "민은 국가의 근본이다. 근본이 말라버리면 국가는 쇠잔해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비록 재야의 유민이나 군토(君土)를 먹고 군의(君衣)를 입고 있으니, 국가의 위망을 앉아서 볼 수만 없다. 인로(人路)가 동심하고 순의하여 이제 의기를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생사의 맹세로 삼는다"고 선언하고, 강령을 "양왜(洋倭)를 몰아내고 권귀(權貴)를 멸한다"고 하여 혁명의 명분이 외세 침략에 항거하고 국내의 봉건적인 귀족 세력을 타도하는 데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들은 봉기하면서 '격문'을 반포하였다.
격문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의 본의가 단연 다른 데 있는 것 아니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자는 데 있다. 안으로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는 데 있다.
양반과 부호 밑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민중들과 방백ㆍ수령 밑에서 굴욕을 당하고 있는 소리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가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격문을 띄운 지 며칠이 지나자 호남 일대의 동학교도와 일반 농어민들이 이들의 거사를 지지하며 구름같이 몰려왔다. 동학의 포가 있는 지역은 각자 지역별로 기포하여 소속 창의대 장소로 모여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동학민중봉기는 곧 삼남에 이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동학혁명에 참여한 세력은 동학교도뿐 아니라 하층관료ㆍ서리ㆍ소외유생ㆍ역졸ㆍ농어민 등 각계각층이 망라되어 국민혁명적 성격을 띠었다. 동학군은 <12개조의 폐정개혁안>을 정부에 제기하여 국정의 민주적 개혁과 외세 배제를 요구하였으며 53개 주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농민민주주의를 시행하고자 시도하였다.
동학혁명은 부패한 봉건세력이 끌어들인 일본군에 의해 끝내 좌절되었으나 반식민지, 반봉건의 민족ㆍ민중운동의 원천이 되어 이후의 민족운동사에 큰 영향을 주고 3ㆍ1혁명, 의병운동,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등의 정신적인 원류가 되었다.
동학혁명은 '토지의 평균분작', '노비문서 소각' 등 정치사회면에서 높은 혁명성과 민중의 뜨거운 참여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 자체와 왕권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데까지는 지도부 사이에 의견이 갈리는 등 정치의식의 한계성과 노선의 갈등 때문에 근대 시민혁명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뒤이은 갑오개혁으로 토지 소유제의 진전, 전제 군주권의 제한, 노비 제도의 전면 폐지, 무명잡세의 폐지 등을 가져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894년의 동학혁명은 조선 봉건제 해체사의 최종적 도달점이며 또한 근대 민족 해방 투쟁사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서, 우리 근대사에서 하나의 커다란 전환기가 되었다.
그 중심부에 김개남 장군이 있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