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신간 도서에 손이 잘 가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지금 내 마음이 몹시 지쳐 있다는 뜻이리라. 연말이라 그런지 이래저래 사람들과의 크고 작은 모임이 많다. 연말 모임은 대개 부산스럽다. 다들 들떠 있고, 시끄럽다. 가끔은 시끌벅적한 자리도 좋지만, 그런 모임이 두 번, 세 번 계속되다 보면 금세 마음이 지친다.
연말엔 새로운 사람들보다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편안한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책도 마찬가지. 내 책장 속의 책들은 믿을 만한 친구들이다. 그들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어떤 문장에 감탄을 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나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다. 그렇기에 그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편안하고, 지루하지 않다.
오늘은 6년 동안 내 책장에 꽂혀 있던,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을 꺼내어 읽는다. 이마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익숙한 책의 얼굴을 마주한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작가의 책을 열어 천천히 눈으로 더듬어본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해 읽었지만 여전히 가슴이 떨린다.
줌파 라히리는 영국 런던, 벵골 출신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한 인도계 미국인이다. <축복받은 집>은 그녀의 첫 번째 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으로 그녀는 오헨리 문학상과 펜/헤밍웨이 문학상을 수상하고, 단편소설로는 이례적으로 퓰리처상까지 수상하며 지금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축복받은 집>에는 총 9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그녀의 작품에는 언제나 인도 사람이 등장한다. 이 소설집에서 두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인도계 미국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이 살고 있는 그곳에서 그들은 경계인이고, 이방인이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그들이 생활하는 모습과, 그들이 느끼는 감정들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서 나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국적과 인종에 상관없이 타인에게 나는 영원히 이해받을 수 없는 이방인이다. 나만 알고 있는 나의 모습과 사람들 사이에서 보여지는 나, 그 경계에서 우리는 자주 발을 삐끗하고 중심을 잃는다.
데브는 자신이 이 도시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미랜더를 데려갔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센터에 있는 마파리움(1935년에 만들어진 대형 유리 지구본)이었다. 그들은 밝게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 판으로 만들어진 방의 내부로 들어갔다. 지구의 내부 같은 모양이었으나, 동시에 지구의 외부처럼 보이기도 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투명한 다리가 있었는데, 거기에 서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데브가 말을 하면 그의 목소리가 유리에 부딪혀서 심하게 반향했다. 때로는 커다랗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미랜더의 가슴에 내려앉듯이, 때로는 그녀의 귀를 완전히 피해 가듯이 반향했다. (149쪽)
나는 자주 관계 속에서 방향을 잃는다. 좋은 관계를 맺고 싶었던 사람과는 사소한 문제로 사이가 틀어지고, 틀어진 관계를 바로잡아보려 애를 써보지만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기도 한다. 정말이지 인간관계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다.
<축복받은 집>에 실린 소설 속 주인공들도 잘 해보려 했으나 자꾸만 어긋나는 관계 속에서 상처를 주고 또 받으며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아 나선다. 소설 속에서 그들이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은 소박하지만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나눠먹는 것이다. 미국에서 직장을 다니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며 살아가는 그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집에서 인도 음식을 요리한다.
쿠민과 회향 같은 향신료가 들어간 '로간조시', '건포도를 넣고 빵가루를 입힌 민스미트', '세몰리나 할바', '계란 커리' 등 고향의 냄새를 가득 품은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그들은 그리움을 달래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렇게 그들은 식탁에 마주 앉은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며 서로에게 담백한 위로를 건네는 것이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집 <축복받은 집>은 내가 항상 곁에 두고 아껴 읽는 책이다. 나는 그녀가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 하나의 단편을 끝맺을 때 쓰는 마지막 문장들을 사랑한다. 이 책 안에는 나의 모든 방황과 외로움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처음 책을 사서 읽었을 때는 <섹시>에서, 결혼하고 나서는 <일시적인 문제>에서, 아이를 낳은 후에는 <센 아주머니의 집>에서 나는 나와 꼭 닮은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보며 울고 또 웃었다. 그리고 언제나 이 책의 마지막 몇 문장에서 나는 완전한 위로를 얻는다.
아들이 좌절할 때마다 나는 아들에게, 이 아버지가 세 대륙에서 살아남은 것을 보면 네가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은 없다고 말해준다. 그 우주 비행사들은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겨우 몇 시간 머물렀을 뿐이다. 나는 이 신세계에서 거의 삼십 년을 지내왔다. 내가 이룬 것이 무척이나 평범하다는 것을 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 고향에서 멀리 떠난 사람이 나 혼자뿐인 것도 아니고 내가 최초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나온 그 모든 행로와 내가 먹은 그 모든 음식과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들과 내가 잠을 잔 그 모든 방들을 떠올리며 새삼 얼떨떨한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 모든 게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나의 상상 이상의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3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