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가 올해 창간 20주년을 맞아 '나의 스무살' 기사 공모를 진행합니다. 청춘이라지만 마냥 빛날 수는 없었던, 희망과 좌절이 뒤섞인 여러분의 스무살 이야기를 기다립니다.[편집자말] |
아빠가 나에게 기대한 것은 '오빠'와 달랐다. 아빠는 내가 살림을 하면서 꽃꽂이 같은 취미 생활을 하는 정도의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가진 여성이 되길 원했다. 실제로 나는 아빠의 권유로 '알공예'를 배우기도 했다. 타조알로 마차를 만들고, 거위알로 보석함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마차는 탈 수 없었고 보석함에는 넣을 보석이 없었다.
나는 쇠사슬에 묶인 아기 코끼리였다
아빠의 말에 의하면 '능력이 있는 남자들은 맞벌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취직하지 말고 꽃집을 하다가 결혼하면 된다고 했다. 그때 나는 뭐라고 했었나?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던 것 같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고, 인생을 살아봐서 다 안다고 말하는 아빠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아기 코끼리를 쇠사슬에 묶어놓으면 나중에 몸집이 커져도 쇠사슬을 뽑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맞다, 나는 아기 코끼리였다.
대학교 첫 번째 성적표가 날아왔다. 성적 우수자로 등록금 면제. 잘못 배달된 게 아닌가 봉투의 주소란을 확인했다. 정확히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었다. 1학년 학생들, 특히 입대를 앞둔 남학생들의 힘이었다. 당시 나는 남자친구를 사귀어볼 심산으로 공대에서 개설하는 교양강좌를 많이 신청했다. 애인은 못 만들었지만, 그것이 의외의 결과를 만들었다. (나의 연애 사업에 관심이 없는) 아빠는 만족스러워했다.
반면 나한테는 소득이 없었다. 애인도 없고, 장학금 중 얼마를 나한테 떼어주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불공평하게 살자'가 가훈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참다못한 내가 말했다.
"반수를 해야겠어요. 약대나 한의대를 가려고요."
"네가 아들이라면 몰라도 딸을 그렇게까지 지원해줄 수 없다."
22년 전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 상황이 고스란히 기억이 난다. 나한테는 가슴에 사무치는 말이었다. "딸을 유학까지 보내는 사람들 보면 이해가 안 된다, 여자는 시집가면 그만이다." 아빠가 한 말이었다. 우리 집 형편이 어렵다고 했다면,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들어온 아들과 딸의 차별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에 또다시 가로막혔다.
'엄마', '아내', '며느리', '여자' 이런 틀에만 끼워 맞추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아빠를 이해하게 됐다
이후 나는 실로 화려한 삶을 살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마시고, 나이트클럽을 갔다. 자취하는 친구 집에서 합숙 생활을 하며 학교는 가지 않았다. 시험을 치지 않아서 학사경고를 세 번(일명 쓰리고) 받기도 했다. 제적을 당할 위기에서 구사일생, 우여곡절을 겪고 졸업을 했다. 내가 졸업을 하게 과정에는 숨은 공로자들이 있는데, 언젠가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날이 오길 바란다.
마흔이 넘으면 부모 탓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사실만을 기술하려 노력했는데, 원망이 느껴졌다면 내 실제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다. 부모님을 포함해서 내가 자란 환경은 정상범위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것에 감사한다. 이상적인 부모를 두지 않은 것이 모든 삶의 실패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면서 내가 만들어가는 부분이 분명히 있으니까.
딸과 아들에게 다른 성역할을 요구하는 것은 아빠 개인의 견해가 아니었다. 당시 사회현상에서 원인을 찾아볼 수 있었다. 오죽하면 '아들과 딸'이라는 드라마도 나왔겠는가. 자신도 여성으로서 남자 형제에게 양보하고, 교육도 못 받았으면서도 아들만 위하는 사람이 '우리 엄마 세대'였다.
아빠는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도시에서 기술을 배우려면 밑천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아빠는 월남전에 지원했다. 베트남에 가서는 전사한 병사의 사물함과 옷을 지급받았다. 제대해서도 아빠에게 사회는 전쟁이었다. 살아남아야 하고, 강해져야 하는 곳이었다. 자신이 고생하는 의미를 자식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아들은 번듯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딸은 현모양처로 편하게 살길 바랐다.
아빠는 중학교도 졸업 하지 못하고 선반 CNC 기술을 배웠다. 자신이 너무 배고팠기 때문에 내 자식만큼은 굶기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았다. 처음으로 전셋집을 얻을 때, 아빠는 집과 공장이 가까운 곳을 찾았다. 엄마를 대신해 우리를 챙기기 위해서였다. 섬유공장에서 일했던 엄마는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나 왔다. 엄마와 아빠는 정말 밤낮없이 일했다. 새벽까지 공장의 기계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 와중에 우리의 탐구생활 방송 시간을 챙기고, 문구점에서 비닐을 사 와서 교과서를 싸주었던 아빠였다.
라면 한 가닥도 편하게 삼키지 못했을 아빠가 보이다
지금 나는 열두 살 난 딸을 키우고 있다. '끝까지 잘 키워낼 수 있을까'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었던 아빠가 생각난다. 두려움과 불안에 맞서서 가족을 지키고 살아내야 했던 그의 시간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키 클 때 영양이 좋아야 한다며 자식에게 한약을 지어주고, 치아는 부모의 관심 척도라며 치과에서 이빨을 뽑게 했다. 그럴 때 아빠는 한약 한 재라도 제대로 먹었는지, 충치로 아프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저녁에 아빠가 밥 먹자고 오면, 우리는 연탄이 꺼진 줄도 모르고 찬 방에 있었다.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번개탄과 라면을 사러 갔다. 아빠는 번개탄을 불을 붙이면서 우리에게 고개를 돌리고 숨을 참으라고 했다. 연탄가스가 머리를 나쁘게 한다고. 엄마가 빠진 밥상에 셋이 둘러앉아 라면을 먹었다. 그럴 때 아빠는 말이 없었다. 온종일 일하느라 고생한 자신보다 우리들이 불쌍해서 라면 한 가닥도 편하게 삼키지 못했을 아빠가 인제야 보인다. 너무 젊고 잘생긴 우리 아빠.
자신이 힘들었던 걸 자식은 겪지 않았으면 했다. 자신의 경험 안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을 주려고 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