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가 올해 창간 20주년을 맞아 '나의 스무살' 기사 공모를 진행합니다. 청춘이라지만 마냥 빛날 수는 없었던, 희망과 좌절이 뒤섞인 여러분의 스무살 이야기를 기다립니다.[편집자말] |
얼마 전 친구가 자신의 초등학교 3학년 아들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말했다. 요즘엔 워낙 다들 빠르다고 하니 크게 놀라진 않았지만, 그런데도 놀랍긴 했다. 초등학생도 '남친', '여친'을 만들고 다닌다니. 아이들에게 '그런 감정이 뭔지는 알고 있는 거니' 하고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
친구 아들에 비해 나는 정말 '이런 방면'으로 정말 느렸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내 마음을 빼앗아간 '오빠들'은 모두 텔레비전 속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농구를 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오빠를 보기 위해 직접 찾아가야 했으나, 당연히 그들과 말 한마디 나누거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얼굴 맞대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하게 됐는데, 그 애가 바로 '스무 살에 만난 대학 동기 Y'였다.
친구들은 왜 '가끔' 다정한 남자에게 빠진 걸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망가지는지) 나는 친구들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대학에서 만난 여자 친구들은 화사한 청춘의 날개를 달자마자 차례대로 '사랑의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편의상 내 친구들을 A, B, C, D로 부르겠다.
가장 먼저 A는 자신과 같은 동아리에 있는 남자애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엔 그냥 캠퍼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흔한 공대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남자애인데, A는 그 아이가 정말 좋다고 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어딘지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 A는 그 남자애가 똑똑하고 또 가끔은 다정해서 좋다고 했다.
다음엔 B가 옆 동아리 남자아이에게 홀딱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남자애 역시 까무잡잡한 피부에 무뚝뚝한 표정이 꼭 A가 좋아했던 그 남자애 같기만 했다. B 역시 A와 비슷한 이유로 그 남자애에게 빠진 듯했다. 똑똑하며 또 가끔은 친절하게 군다나. 왜 내 친구들은 가끔만 다정하거나 친절한 남자에게 빠지는 걸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마음이 설레는 건 찰나다. 도리어 상대를 하염없이 떠올리느라 바보 같아지거나 아니면 그와 나와의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슬퍼해야 한다. 나는 이미 A를 통해 알고 있었고, B를 통해 재확인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 그 애는 나를 동아리 '친구 15'쯤으로 생각할 때의 심정이란.
B는 결국 고백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B를 어찌나 뜯어말리고 싶던지. 그 애가 친구를 좋아하는 눈치라곤 없는데 무턱대고 고백을 해버린다니. 하지만 B는 내 생각과 다른 듯했다. 우선 이쪽에서 마음을 표현해야 그 애도 자기의 마음을 따져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우리는 B가 고백하기 며칠 전부터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고백을 해야 좋을지 의논했다. 하지만 B는 저도 모르게 그냥 아무 때, 아무 데서나, 충동적인 방식으로 고백을 해버리고 말았다. 둘이 자주 마주치던 동아리 방 근처 복도에서. B는 차였다. 우리 A부터 E(나)까지는 한동안 B를 위로해주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위장에 술을 쏟아부어야 했다.
스무 살, 아무 이유 없이 사랑에 빠지다
우리는 그해 내내 똘똘 뭉쳐 다녔다. 어느 정도였냐면, 수업을 듣다가 A와 E(나)가 몸을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문을 가리키면 B와 C 그리고 D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 준비가 끝난 걸 확인하면 나쁜 학생 다섯 명은 마치 당구공이 하나씩 구멍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듯 문을 차례대로 빠져나갔다. 가끔은 F, G 등 남자친구들도 우리를 따라 나오곤 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주로 피시방, 포켓볼장, 보드 게임방이었다. '가끔' 술집에 가기도 했는데, 앞에다 '가끔'을 붙인 이유는 낮부터 술을 마시는 걸 자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낮부터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E(나)가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E가 자주 슬퍼졌기 때문이다.
A와 B는 지난 사랑에서 벌써 깔끔히 벗어난 상태였고, C는 우리 중 처음으로 보란 듯이 연애를 하고 있었다. D는 눈에 띄는 누군가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D는 2학년이 된 후 후배와 짧게 연애를 했다. 그러나 그 연애 끝에 D는 자신이 연애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내가 아는 사람 중 최초로 '비혼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얼마 전부터 아무 이유 없이 Y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어느 날은 의문이 들었고(내가 걔를 왜 좋아하지? 걔는 내 스타일이 정말 아닌데), 어느 날은 그 애가 너무 보고 싶었고(보면 뭐해, 걔가 나한테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어느 날은 괜히 그 애를 괴롭히고 싶었다(초딩때도 안 하던 짓을 이제 와서?). Y는 말랐다는 점을 제외하곤 정말 내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
나는 Y처럼 착하기만 한 사람, 그래서 사람들한테 맨날 놀림을 받는 사람, 기분 나쁜 티는 내지 않고 헤헤 웃어버리는 사람들을 바보 같다고 싫어했다. Y 옆에 앉아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실 때면 그가 하는 말이라곤 "에이, 왜 그러세요" 밖에 없는 것 같았다. 누가 놀리면 큰 눈을 끔벅이며(나는 눈이 큰 남자도 싫어했다) 웃는 게 전부였다.
폐인처럼 살고 있는 듯해 그 점도 마음에 안 들었다. 아침에 그를 보면 피곤해 보일 때가 많았다. '어제 뭐 했냐'고 물으면 "밤새 술을 마셨다거나 피시방에 있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Y를 좋아하고부터 Y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물어 찾아다니곤 했는데, 그는 자주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당구를 치고 있었다. (나는 담배 냄새도 무지 싫어한다).
싫은 것 투성이인 이 애가 왜 좋을까. 나도 내가 이상해서 자주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꼬리에 꼬리를 문 의문 끝에 이런 결론에 다다르곤 했다.
"Y는 착해서 좋아."
착한 건 싫은데, Y는 착해서 좋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나.
Y가 착한 건 A, B, C, D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우리는 Y가 화를 내거나 욕하는 걸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상대의 장난이 심할 경우 약간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지만, 그래 봤자 Y가 하는 소리라곤 "그만 해요"가 전부였다. Y 곁에 있을 때면 '저렇게 착해 빠져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Y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 일쑤였다.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닌, 내가 좋아하게 된 남자애의 얼굴을.
나는 Y와 친하지는 않았다. 애가 수줍음을 타고 착하다 보니까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그 시절 나와 친했던 남자애들은 다 나처럼 까칠했고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다. 또 나를 스스럼없이 대하는 애들이었다. 나는 친구들을 통해 Y의 소식을 전해 듣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어느 날 Y가 소개팅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곤,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A부터 D까지 불러 모아 술을 마시며 절절히 슬퍼했다. 그날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이렇게 마음 아프고 슬픈 일이라면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으며.
그래서 그 아이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B처럼 고백 한 번 해봤으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스무 살의 나는 Y를 좋아했으면서 고백할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못했다. 누가 좋아지면 그냥 계속 혼자 좋아하면 그뿐이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미 나는 텔레비전 속 오빠들을 '사귀고자 하는 마음 없이' 몇 년 동안 혼자 좋아했던 전력이 있었기에, 눈앞에 있는 Y를 향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고백했다가 차일까 봐 자기 합리화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다른 아이들보다 늦되서였다. 당시 나는 누군가를 사귄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스무 살의 내게 연애는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나 벌어지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나 닥치는 그런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상상이 되지도 않았다.
'사귀면 뭘 해야 하지?'
'누군가와 사귄다는 건 아무래도 좀 어색한 일이지 않을까?'
그때 Y 역시 나를 좋아했다면, 그래서 Y가 나에게 고백을 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나는 그러면 Y를 피해 다녔을 것이다. 고백했다면 거절했을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받았는데 그 고백을 거절한다고?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나에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몸과 다르게 마음이 하는 일은 자주 불가해하고 아리송하며 애매하니까.
실제 3년 뒤 한 남자가 내게 적극적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그 남자를 치한 물리치듯 물리쳤다가, 나중엔 내가 더 좋아해서 사귀게 됐다.
Y를 좋아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석 달 정도 좋아하고 말았다. 그 애를 생각하며 많은 술을 마셨고, 덕분에 살도 착실히 찌웠다. 어느 순간 Y를 봐도 더는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나는 조금 서운해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후로도 나는 계속 Y를 좋아했다. 모두에게 부드럽고 스무 살 남자치곤 참으로 고요했던 친구로서의 Y를.
지금 생각해보면 Y는 나를 보며 늘 웃었다. 수줍으면서도 친절한 웃음이었다. 날 보며 언제나 웃어주는 그 모습이 참 좋았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나는 그 애가 웃는 게 좋아서, 그 애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서, 그래서 그 애를 좋아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