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가 올해 창간 20주년을 맞아 '나의 스무살' 기사 공모를 진행합니다. 청춘이라지만 마냥 빛날 수는 없었던, 희망과 좌절이 뒤섞인 여러분의 스무살 이야기를 기다립니다.[편집자말] |
패기 넘치던 스무 살, 대학만 들어가면 뭐든 다 되는 줄 알았으나 1987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대학 신입생이었던 나는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면서 하숙비조차 내지 못할 비참한 처지였다. 게다가 당시 서슬 퍼런 독재정권 시절, 힘겹고 암울한 현실은 안 그래도 어려운 나를 더욱더 힘들게 했다.
유행가 가사처럼 커피를 알고 낭만을 알아가는 나이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봄은 여전히 찬란했지만, 세상은 자유를 잃어가고 있었고 낭만으로 대변되는 캠퍼스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스무 살, 1987년은 그렇게 힘겹게 다가왔다.
'민주'라는 말 한마디에 끌려가고, 헤어스타일이 대통령과 닮았다는 이유로 방송에서 보이지 않게 되고, 운동권들이 많이 부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노래는 금지를 당했다. 그나마 학교 주막에서 마신 막걸리 한잔은 주체할 수 없는 현실의 고민과 불안을 잠시 잊게 해주는 위안이었다.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 사랑은 그럴 때 아름다워라. 술 마시고 싶을 땐 한 번쯤은'으로 이어지는 민중가요 가사를 거울삼아 짝사랑의 열병을 지독하게 앓았다. 밤새 술과 싸우다 생사를 오가기도 했지만 현실도피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조치를 계기로 학생들의 민주화 불꽃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6월 9일 연세대학교 이한열 학우가 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아 쓰러지면서 6월 민주항쟁의 거센 불길이 타올랐다. '민주 항쟁'의 씨앗이 잉태되자 결국 문교부(현재의 교육부)는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내가 다닌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종강을 한 달 앞두고 학교에 안 가니 이미 여름방학이나 다름없었다. 학우 중 일부는 국가의 암울한 현실을 고민하고 민주화를 향한 행렬에 하나둘씩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민주화를 향한 고민조차 나에겐 사치였다
거듭되는 하숙집의 방값 독촉에 주인을 피해 밤늦게 들어가는 일이 잦아졌고, 아침이면 방문 앞에는 '학생 방값 밀렸음'이라는 경고문이 붙었다. 사정이 이러니 나라의 민주화를 고민하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결국 석 달 이상의 긴 여름방학의 시작은 내게 고된 노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기울던 집안 형편은 오히려 더욱 악화했고, 60만 원에 이르는 2학기 등록금에 방값과 생활비 등을 포함해 150만 원 정도는 무조건 벌어야 했다. 2학기를 한 달 정도 앞두고 등록이 시작되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두 달이었다.
무슨 일이든 돈만 된다면 마다치 않고 달려들었던 나의 스무 살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 길로 고향인 여수로 내려갔다. 집에서는 등록금을 어떻게든 마련해 보겠다며 만류했지만, 현실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여천공단 플랜트 공사 현장의 일당 막노동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일당'이 문제였다. 용역업체는 어린 초보자임을 고려해 용접이나 판축(담장 쌓는 일) 일을 권했다.
그러나 기껏 1~2만 원의 조공('데모도'라고 불리는 조수) 일당을 받고 싶지 않았다. 단기간에 큰돈을 벌려면 무조건 단가가 높아야 했다. 초보자도 가능하고 일당 단가도 3만 원 이상을 받는 '질 좋은 일자리', 그것은 바로 '탱크 청소'였다.
투입된 현장은 정유회사 보수공사장이었다. 말이 탱크 청소지, 탱크를 새로 만드는 공정이나 다름없었다. 철제탱크 내부로 들어가 내벽의 낡은 코팅제를 벗겨 내고 새롭게 코팅제를 도포하는 작업이었다. 주어진 유일한 작업용 도구는 달랑 전동연마기 1개가 전부였다. 1평도 안 되는 공간에 두 명이 함께 들어가 코팅제를 벗겨 내고 긁어내는 작업이었다.
탱크의 작은 입구를 통해 몸을 겨우 밀어 넣어 들어가면 일단 숨을 쉬기 힘들었다. 무더위가 오기 전인 6월이었지만 땀은 비가 오듯 주르륵 흘렀다. 분진 배출을 위해 환풍기를 가동했지만, 신선한 공기가 공급되지 않아 질식사고는 흔한 일이었다. 오히려 연마기에 의해 벗겨져 튀어 오르는 코팅제 파편은 참을 수 있었다. 파편과 분진이 가득한 밀폐 탱크 안에서 숨을 참아가며 벽을 문지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내가 이 일을 하기 전까지는 지옥을 믿지 않았지만, 이 인생 최대의 극한 노동으로 이미 지옥을 맛보고도 남았다. 30년보다 더 길었던 30일. 탱크에서도 집에서도 심지어는 꿈속에서까지 그놈의 파편과 분진이 나를 따라다녔다.
일을 마치고 세수를 할 때마다 눈코입은 물론 귀에서까지 분진이 섞인 시커먼 가루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씻어내도 계속 나왔다. 일을 마치면 일꾼을 감독하는 십장이 삼겹살을 사줬던 이유가 다 있었다. 함께 일했던 30대 아저씨는 3일 후 나타나지 않았다. 일을 못 하겠다며 포기하고 다른 작업장에 투입됐다. 극한 작업인 만큼 이런 경우는 아주 흔했다. 이후 탱크 작업은 나에게 모두 맡겨졌고 일당도 1만 원이나 더 올랐다.
그렇게 2학기 등록금을 마련했다. 앞으로는 내가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내 손으로 처음 받아든 등록금 영수증을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런 막노동을 하려고 민주화를 향한 동참을 외면했다는 자책보다는, '세상에 좋은 일'로 돈을 벌었다며 나를 스스로 위로하기 바빴다.
그렇게 내가 현실에서 도피하며 막노동을 하는 사이, 학우들의 피눈물이 나는 노력으로 국가는 시국 수습선언을 발표했고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 개헌까지 이뤄냈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청년의 사명감 잊지 말아달라'는 약속
그해 겨울, 친구 따라 이웃 대학에 갔다가 우연히 윤선애(서울대 84학번)씨의 무대를 보았다. 참으로 절절한 무대였다. 단아한 체구에 비음 섞인 선동적 성량과 애끓는 음색으로 불렀던 이한열 열사의 추모곡 <벗이여 해방이 온다>는 온 가슴에 전율로 다가왔다. 마치 한동안 현실을 회피하고 안전한 길을 좇았던 나에게 결코 청년의 사명감을 잃지 말고 살라는 숙제를 안겨주는 듯했다.
33년이 지난 지금,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스무 살 시절 경험한 극한알바를 떠올리곤 한다. 현실과 타협하고 이 자리에 쉽게 안주해 버린 내 모습을 볼 때마다 항상 내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하자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나저나 "그대 뒤를 따르리니"라며 울림을 준 윤선애 누님은 요즘 무엇 하고 계시나요.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파마 스타일은 좀 바뀌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