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세상 효도를 다 한 것 같았다. 4년만 지나면 번듯한 교사가 되어 어려워진 집안 형편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았고 당장 학비 마련에 고심하시는 부모님에게 국립대학 등록금은 장학금까지 더해져 고등학교 등록금보다 더 싼 수준이었다. 그렇게 원하는 대학에 가는 것으로 탄탄한 미래를 보장 받고 더불어 아름다운 오늘을 얻을 것 같았다. 그러나 대학은 아름다운 곳이었기에 오히려 참담할 수 있었음을 아직 몰랐다.
신입생, 아름다운 우리말로 '새내기'는 97학번이라는 스마일 표시를 달고 선배들과 소위 '밥팅'을 실컷 할 수 있었다. 얼굴 익히고 친해지는데는 밥이 최고라고 선배에게 달려가 꾸벅 인사하며 새내기 누구누구입니다 하면 누구나 웃으며 밥을 사주었다. 꽃 피는 봄에 점심 시간은 즐거움 그 자체였다.
상냥하고 예쁜 여자 선배들에게는 '누나 누나' 부르며 애교를 떨어 나름 비싼 메뉴를 얻어먹었다. 시커먼 복학생 선배나 1~2년 차이 밖에 안나는 선배들에게는 형이라고 따라다니며 가장 싼 메뉴인 라면밥을 얻어먹어도 배는 불렀다. 그러나 그 좋은 시절도 잠깐이었다. 중간고사를 기점으로 하여 점차 밥팅은 저물어갔고 붙임성이 정말 좋은 새내기가 아니면 공짜밥은 먼 이야기였다.
동기끼리 삼삼오오 밥을 먹으러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평범하면서 당장 밥값이 신경쓰이는 대학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니, 밥 뿐이면 괜찮았다. 부모님께 책 산다고 교재 산다고 얻어낸 돈으로 밥 정도는 어찌어찌 해결되었다.
문제는 캠퍼스의 낭만, 세기말적 유흥을 즐기던 분위기, 말 그대로 '먹고 죽자'는 식의 끝없는 음주 문화였다. 사실상 집이 가난해 거의 고학생 신분이던 나는 -물론 동기나 선배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따지고 보면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대부분인 특수목적대학이지 않은가- 매일 이어지는 술자리가 부담스러웠다.
아무리 새내기라도 계속 이어지는 모임에 주머니에 손만 넣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작게는 회비에 많게는 '오늘은 내가 쏜다'까지 분위기를 타는 술자리의 비용은 차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러다보니 차츰 몇 번의 핑계를 대며 모임에 안 나갔고 동아리방에 발걸음이 줄어들었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초반에 싹싹하더니 변했다', '새내기가 건방지게 선배가 불러도 안 나온다' 등의 평판을 만들어냈다.
적극적으로 해명하기도 어려웠고 다른 이유는 붙일 것도 없었다. 가난한 대학생은 작은 것으로 벽을 쌓았고 그렇게 쌓인 벽은 열등감으로 단단해졌다. 친구들도 때로는 '빈대', '짠돌이'라며 손가락질을 했고 울분이 치솟았지만 시원하게 아니라고 하지도 못했다.
가난한 사랑 노래의 비극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가난한 사랑 노래'를 불렀던 신경림 시인의 말은 가슴에 사무치는 진리이다. 순수하면서도 열정이 불타오르던 스무 살, 사랑은 매일 오고 갔다. 젊은 혈기는 사랑을 그리워했고 연애는 꿀같이 달콤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사랑에도 돈은 장애물이었다.
누구는 100일 기념 장미꽃 100송이를 선물하고, 누구는 커플링을 맞춘다고 했다. 남이섬으로 1박 2일의 여행은 필수였다. 그러나 나는 일상적인 연애 코스이던 영화, 카페, 저녁도 부담스러웠는데 가끔 가는 놀이공원 자유이용권에 허리가 휘청했다. 그때만 해도 남자는 가오, 즉 폼이 생명이라 '폼생폼사'하던 때였기에 데이트 비용은 오롯이 남자들의 몫이었고 그 때문에 연애를 접을까도 생각할 만큼 힘들었다.
그리고 결국 가난 때문에 연인을 떠나보내면서 '없는 집구석'인 부모님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젊음만 가지고 다른 것은 가지지 못했던 나의 스무 살은 스무 살의 객기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경제의 그늘을 안고 있었다. 가난은 청춘의 꿈과 열정을 많이 꺾고 누르는 무거운 존재였다.
지금 내 나이 마흔이 넘어 그때를 돌이켜보면 후회가 많이 남는다. 당장 몇 푼의 돈이 뭐라고 부모님께 애걸복걸하거나 알바를 더 하거나 다른 방법이 많이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그저 의기소침하고 혼자 고민하다가 힘겨워만 한 것 같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기에 후회가 남는다.
번듯한 직장이 있고 적어도 먹고 사는 일과 삶의 즐거움을 좇는 일에는 어려움이 없는 지금에 그때를 추억하면 이불킥할 만큼 부끄러운 일이지만 다시 생각하면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나는 그렇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청춘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고, 그 가난한 청춘이 지금의 나를 만든 원동력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오로지 젊음을 밑천으로 나는 발전해서 지금이 되었고 다시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를 만들어 갈 것이다. 누군가 물어 보면 나는 대답할 것이다. 나의 스무 살은 가난해서 아름다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