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5월10일 첫 선거 후 모두 16명 국회의원 배출
김영삼·김봉조·김기춘·윤영·김한표 '대금산 정기 풍수설'도 나돌아
'총선'이라 불리는 국회의원 선거. 오는 4.15 치러지는 제21대 총선까지 7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우리나라의 초대 국회의원 선거는 미국이 제안한 '접촉이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우선 총선을 실시하자'라는 안을 유엔이 받아들여 1948년 5월10일 남한 단독으로 치렀다.
미국이 제안한 선거일은 5월9일이었으나 그날이 일요일이라 투표를 반대하는 기독교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하루 연기해 5월10일 초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적극적인 친일파를 제외한 21세 이상의 유권자는 784만명이었고, 948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198명의 최초 국회의원이 탄생했다.
3대 김영삼 의원 뽑아 대통령 탄생 발판 삼아
초대 제헌국회 의원 총수는 300명이었으나 제주 4.3사건으로 인해 선거를 실시하지 못한 제주도 몫 2명과 북한 몫으로 남겨둔 100명을 제외한 198명이 5.10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됐다.
1948년 당시 거제는 통영군에 속해 있어 '통영 을' 선거구로 총선을 치렀고 서순영이라는 당시 변호사를 초대 국회의원으로 선출했다. 서순영 초대의원은 거제 출신이며, 반민특위 부장 재판관으로 활동했다.
제2대는 거제출생의 이채오 의원으로 대한수산 중앙회장을 지냈다.
제3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영삼 대통령이다. 거제 외포 출생으로 당시 24살이었으나 나이를 고쳐 출마했다고 한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은 부산 제2선거구에서 민주당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됐고, 거제 출신 대통령으로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제4대는 거제 동부 출생의 진석중이며, 제5대 국회의원에도 출마했으나 선거기간 도중에 사망했다.
제5대는 하청 출생의 윤병한 의원으로 5.16으로 인해 국회가 해산됐다. 당시는 국가 재건최고회의가 존재했다. 제5대 선거에는 12명이 출마해 제2공화국시절 국내 정치가 얼마나 과열돼 있었는지 보여준다.
4선 의원 김주인, 예결위원장 및 거제대교 건설 초석 마련
제6·7·9대는 동부 출신 김주인씨가 당선됐다. 제10대 때는 현재의 비례대표격인 유신정우회(일명 유정회) 의원으로 당선돼 전체 4선 의원이 됐다. 민주공화당으로 출마한 김주인은 민주당 반성환 후보에게 승리했다. 김주인은 임난공신 김후석 장군의 후손으로 거제 경주김씨의 지지를 받았고, 예결위원장 및 한·일 경제연합회 회장과 국회 헌정회 회장을 지냈다.
거제 출신으로는 김영삼 대통령 다음으로 3선 지역구와 유신정우회를 포함해 4선 의원이다. 예결위원장 당시 거제대교 건설유치를 위해 노력해 '거제대교 건설은 김주인의 덕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제8대는 이학만 의원. 장승포 출생으로 수산업 전문가였다. 선거에는 신민당의 김봉조가 출마했으나 등록무효가 됐다. 제8대 국회는 비상국무회의로 국회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됐다.
제9대는 김주인 의원이 민주공화당으로 당선됐다. 1973년 치러진 총선은 거제·통영·고성에서 2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중선거구 제도였다. 거제출신으로 단독 출마한 김주인과 고성 출신으로 출마한 최재구가 당선됐고 통영의 김기섭은 낙마했다.
제10대도 거제·통영·고성의 중선거구제였는데 김봉조가 출마했으나 고성출신 최재구, 통영 김기섭씨의 아들 김동욱이 당선됐다. 거제출생 지역구 출마자는 당선되지 못했다. 다만 3선 의원 김주인이 유정회 의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암살로 인해 국회는 '입법회의에서 장악하게 되며 전두환 군사정부 시절이 시작된다.
김봉조·김기춘 3선 의원 연이어 나와
제11대도 중선거구로 사등 출생의 조형부가 통영 출생의 이효익과 함께 당선됐다.
제12대도 중선거구제였다. 당선자는 군사정권의 수혜자로 불린 정순덕이며, 민주주의 선봉 김영삼의 수혜자 김봉조가 당선됐다. 군부독재 시절에도 자유·민주주의를 외쳤던 거제 군민들의 열정과 김영삼의 사랑이 김봉조를 당선시켰다고 볼 수 있다.
제13·14대는 거제군 단일 선거구인 소선거구제가 돼 김봉조가 당선됐고, 제14대 총선은 거제군·장승포시 선거구였다. 이때 대우조선노조 출신의 양동생·장대헌이 출마했고 노동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15대는 거제시민이 현재를 보며 '예견된 것 아니냐. 그래도 거제출신'이라 아쉬워하는 김기춘 시대가 열렸다. 김봉조의 3선을 이어 김기춘 또한 15·16·17대까지 3선 의원이 됐다.
"거제시민들은 특정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지 않았다"
김기춘 의원도 제16대 선거 때 민주국민당의 김한표 후보를 만나 박빙의 선거를 치렀고, 제17대 선거 때는 김한표 후보가 법적문제로 출마를 못했다. 장상훈·나양주 등이 분투했으나 김기춘에게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무소속으로 출마하려 했으나 선관위에 등록하지 않고 사퇴했다. 김영삼·김봉조·김기춘·윤영·김한표 등 장목출신이 국회의원으로 다수 배출됨에 따라 대금산 정기를 이야기하는 풍수설이 생겨나기도 했다.
제18대는 거제시장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윤영이 김한표를 이기고 당선됐다. 하지만 제19대는 공천에서 윤영은 배제돼 무소속의 김한표가 12년간 3번째 출마해 당시 새누리당의 진성진 후보와 진보신당의 김한주를 누르고 당선됐다.
제20대 선거는 김한표 의원의 재선이냐 새로운 더불어민주당 후보 변광용이냐 하며 각축을 벌였다. 새누리당의 김한표가 유력하다고 판단했으나 후반부에 문재인의 바람과 노동자들의 지지로 변광용이 부상했고, 730표차라는 석패와 함께 무소속 이길종이 양보했다면 변광용이 승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지나간 버스 손 흔들기' 이야기도 있었다.
72년간의 거제 국회의원 발자취 토대…거제는 풀뿌리 민주주의 모범 지역
역대 총선 당선자들을 살펴봤다. 거제는 어느 후보에게 무작정 표를 몰아주지 않는 곳이며, 여당 후보를 당선시켜도 야당 후보에게도 힘을 실어 당선된 후보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를 보낼 수 있는 지역구다. 풀뿌리 민주주의 모범이 되는 지역이다.
이번 제21대 총선을 보면서 우리 거제시민의 힘을 새삼 느끼게 한다. 공천을 자신하던 후보들이 쓴잔을 마시는 등 거제시민들이 이변을 낳게 했다.
제나 도전자가 등장했고, 3선 이후에는 공천에서 낙마시키던지 투표에서 낙선시켰다.
역대 출마자들이 꼭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거제신문에서 본 기획기사를 준비한 것은 거제가 필요로 하는 후보를 선출해 '유권자가 갑'이 되기 위해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거제신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