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는 육군 준장으로 1960년 1월부터 육군대학 부총장을 1년 지내고 육본관리 참모관리심사처장을 거쳐, 국방부 총무과장 재임 중 박정희가 주동한 5ㆍ16 쿠데타를 맞았다.
육사2기생과 8기생들이 주도했지만 그는 주체세력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보아 박정희와는 동향이고 동기생인데도 군대 안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 같다.
5ㆍ16 후 2기생 중에는 한웅진 소장과 한신 소장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으로 들어갈 정도였다.
"5ㆍ16이 성공한 뒤 2기 혁명주체인 한웅진 소장은 박대통령에게 동기생들을 될수록 많이 발탁해 쓰도록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동기생이면 다 동기생이냐? 동기생을 불러들이면 동기생만 쓴다고 욕을 먹게…"하고 거절했다고 한다." (주석 1)
아무리 쿠데타를 주동하여 군권은 물론 국권을 장악한 박정희라도 너, 나 하고 지내던 동기생들보다는 부리기 쉬운 처조카 김종필이 주도한 8기생 출신들이 만만했을 터이다.
그런데 5ㆍ16이 터지고 정확히 한 달이 지난 6월 16일 김재규는 호남비료회사 사장으로 발령되었다. 평소 거북했던 동기생을 유배시킨 것인지, 안전한 후방에서 지내도록 봐준 것인지, 아무튼 김재규는 1963년 8월 20일까지 26개월간 호남비료 회사에서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신분으로 지내야 했다.
그는 6월에 당시 건설중이던 나주의 호남비료사장으로 임명되어 군복을 입은 채 취임, 지지부진하던 건설공사를 완공시킨다. 그는 이 때 공장 완공에 공을 세우면서 심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건설회사를 강하게 몰아쳐 공사기간을 약 1년간 단축시키는 과정에서 무리가 따랐기 때문이다. 그는 아침 2시간, 오후 2시간씩 작업시간을 늘려 매일 12시간 노동을 강요했고, 공사세부까지 감독, 부실한 자는 즉각 해고시키는 등 군대식 돌진방법을 강행하여 반발을 샀다는 것이다. (주석 2)
이때의 경험과 경영수완은 뒷날 그가 건설부장관이 되어 중동건설 수출을 적극 추진하여 큰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중동 붐의 시기였기는 하지만 그의 치밀한 계획과 적극적인 추진력에 힘입은 바 적지 않았다.
김재규의 동기생 박정희는 5ㆍ16 쿠데타를 일으켜 장면 정부를 타도하고, 2년여 동안의 군정에 이어 당초의 원대복귀 약속을 뒤엎고 민정에 참여하여 1963년 10월에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을 누르고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4대의혹사건 등으로 거액의 정치자금을 조달하고, 구정치인들을 정치정화법으로 묶어놓은 상태에서, 사전 조직한 민주공화당을 발판으로 대선에서 승리한 것이다.
박정희는 쿠데타와 민정참여의 명분으로 반공체제의 강화와 경제발전을 내세웠다. 반공은 중앙정보부를 통해 손쉽게 리드가 가능했지만, 문제는 경제발전이었다.
일본에 손을 내밀었다. 아직 군정시절인 1962년 11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외상 오히라 사이에 비밀회담이 이루어지고, 무상공여 3억 달러ㆍ차관 3억 달러 제공으로 대일 청구권 문제를 일괄 타결하였다. 35년간 식민통치에 대해 면죄부를 준 댓가 치고는 굴욕적인 합의였다. 그나마 철저한 장막 속에서 이루어진 회담이어서 국민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1964년 3월 야당에 의해 굴욕회담 내용이 드러나면서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학생들의 결렬한 반대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5ㆍ16쿠데타 이후 최초로 야당과 시민ㆍ학생들의 궐기였다.
호남비료회사 사장을 마친 김재규는 1963년 9월 1일자로 제6사단장으로 보임받았다. 서울 근교에 위치한 6사단은 정치ㆍ군사상 대단히 중요한 부대에 속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왜 김재규를 이같은 위치의 사단장을 김재규에게 맡겼는지를 두고 양론이 따른다.
쿠데타 이후 동향ㆍ동기생인 두 사람 관계가 매우 긴밀해졌을 것이라는 주장과, 군일부의 반혁명사건으로 쿠데타 주도세력 일부가 떨어져 나간 데다, 민정이양 후 민간세력의 비판으로 취약해진 정권을 보위해 줄 인물은 결국 동향ㆍ동기생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는 박정희의 '용인술(用人術)'이 그를 불러낸 것이라는 평가다.
한일회담의 진행과정을 비밀에 부쳐온 박정희 정부는 1964년 3월에야 한일회담의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의 방침을 밝혔다. 이에 따라 야당과 재야는 즉각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유세에 돌입한 데 이어, 3월 24일 서울대생들은 '한일회담의 즉각 중지'를 요구하는 집회를 갖고, 이케다 일본수상과 '현대판 이완용'의 김종필 화형식을 거행한 뒤 가두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시위는 삽시간에 전국 대학으로 번져나가서 5월 20일 서울 시내의 대학생연합이 박정권이 표방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하고, 4ㆍ19민족ㆍ민주이념에 정면 도전한 군사쿠데타 정권타도 투쟁을 선언했다. 이날 시위로 학생 1백여 명이 부상하고 2백여 명이 연행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굴하지 않고 단식농성 등을 벌이면서 투쟁을 계속하여 6월 3일에 이르러 1만여 명의 시위대가 광화문까지 진출, 파출소가 방화되기에 이르렀으며, 군사쿠데타, 부정부패, 정보정치, 매판독점자본, 외세의존 등 군사정권의 본질적인 문제제기로 확대, 비판 분위기가 고조되어 정권퇴진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학생들의 데모에 많은 시민이 가담하면서 시위대의 규모가 커지자 박정희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어, 그날 밤 8시를 기해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탄압을 개시했다. 계엄사령부는 포고령으로 일체의 시위금지와 언론ㆍ출판의 사전검열, 모든 학교의 휴교를 명령했다.
김재규는 사단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진입했다. 덕수궁에 지휘소를 두고 광화문에서 중앙청을 향해 왼쪽을 맡았다. 28사단은 그 반대쪽을 담당.
부대배치는 밤사이에 이뤄졌는데, 시민들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이미 시내 요소요소에 계엄군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실탄을 장전한 기관총을 걸어놓고 있었다. 사상 처음으로 대학캠퍼스에까지 군이 진주했다.
그간 김재규는 강경파 정부각료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본 것 같다. 당시 K장관이 데모현장에서 주운 하이힐 6가마 반을 무슨 전과라도 되는 양 말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기도 했고, 데모진압 도중 여학생의 가슴을 만졌다는 소문에 대노하기도 했다고 한다. (주석 3)
주석
1> 장창국, 앞의 책, 96쪽.
2> 김대곤, 앞의 책, 122쪽.
3> 앞의 책, 12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