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에게 김재규는 어떤 존재였을까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박정희가 워낙 복합적인 인물인데다 김재규 역시 단순하지 않는 성품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10ㆍ26거사 당시 궁정동 만찬의 현장에 있었고, 박정희와 김재규 두 사람과 가까웠던 김계원 전 청와대비서실장이 군사재판 전창렬 검찰관의 신문에 대한 답변이다.(발췌)
김계원 : 60년도 4ㆍ19 직후에 제가 육군대학 총장으로 진해에 부임하니까, 김재규 부장은 거기에 부총장으로 근무 중이었습니다. 거기서 처음으로 친근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6개월간 같이 근무하는 동안, 둘 다 가족은 서울에 있고, 학교 안에 있는 관사에 같이 있었기 때문에, 조석으로 자주 만나서 친근해졌습니다.
특히 그 당시에 작고하신 각하께서 부산의 군수기지사령관으로 계셨기 때문에, 김재규 피고인은 돌아가신 각하와 고향도 같고 가까운 사이여서 육군대학이 여러 가지 보급면에서 어려운 때는 김재규 피고인이 부산에 가서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아오곤 해서 특별히 가까워졌고, 또 한번은 육해군 합동 군수물자 상륙훈련이 마산에서 있었습니다.
그 후에 제가 1군사령관 당시에, 김재규 피고인이 현리에서 6사단장으로 있었는데, 그 당시에 한 번 돌연히 각하께서 저녁에 김재규 피고인의 사단장 숙소에 가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본 피고인과 동행한 일이 있었고, 사단장 숙소에서 각하를 모시고 저녁 만찬을 같이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본인이 육군참모총장 당시, 김재규 피고인은 6관구사령관으로서 육군본부에 여러 가지 군수보급지원을 하고, 특히 국군의 날 행사 같은 때는 6관구에서 전반적인 보급지원의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본 피고인이 중정부장 당시에 김재규 피고인은 육군보안사령관을 했습니다. 업무상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고 그 당시에 여러 가지 내적인 문제도 제가 해결해준 일이 있습니다.
본 피고인이 주중대사로 있는 동안, 김재규 피고인이 건설부장관으로서 사우디에 갔다 오는 길에 대만정부의 초청을 받고 대만에 들러서, 본인과 이틀 같이 있은 일이 있습니다. 본인과 특별히 가까운 사이였고, 본인이 대만에 근무한 지가 그 당시 이미 4, 5년이 경과되었기에, 본국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각하와 특별히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고, 본국에 돌아올 수 있는 길을 건의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습니다.
주중대사로 있는 동안 본국에 오면, 한번인가 두 번 김재규 피고인이 부부동반해서 저녁 초대를 해준 일이 있습니다. 본 피고인 생각에는 본인과 김재규 피고인은 남보다 좀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검찰관 : 그 당시에 각하께서 6사단장 숙소를 직접 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습니까?
김계원 : 국방장관이 김성은 씨였습니다. 국방장관하고 각하하고 낮에 청평인가에 갔다오시다가 저녁에 거기 들렀습니다. (주석 4)
김재규는 1973년 3월 5일 17개월간 머물렀던 제3군단장을 마지막으로 예편되어 25년간의 군인생활을 마치면서 「장부한(丈夫恨)」이란 한시를 남겼다. 이 시는 후임 군단장이 군단 법당 앞 주춧돌에 새겨놓았다가 10ㆍ26 후 철거되었다.
장부한
眼下峻嶺覆白雪 - 안하준령복백설
千古神聖誰敢侵 - 천고신성수감침
南北境界何處在 - 남북경계하처재
國土統一不成恨 - 국토통일불성한
눈 아래 준령에 흰 눈이 덮여 있다
이 천고(千古)의 신성(神聖) 함을
누가 감히 침략할 수 있으리요
남북의 경계는 그 어디에 있는가
나라의 통일을 이루지 못해 한(恨)이로다.
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군부를 떠난 것이 한스러워 읊은 것으로 인식되지만, 문맥을 살펴보면 달리 해석할 여지가 담긴다.
"이 천고의 신성함을 누가 감히 침략할 수 있으리요."의 대목은, 국민의 신성한 천부인권을 짓밟은 유신쿠데타를 비판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풀이다.
주석
4> 김재홍, 『비공개 진술(상)』, 171~17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