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 우리는 암흑의 세월 속에서 아픔을 견딘 분들께 보상해 드리고자 마음을 모았다. 바로 강제징용 전범기업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제기한 것이다. 2018년 10월 30일, 우리나라 대법원은 신일본제철에게 강제징용 배상자 4분께 1억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안타깝게도 원고(강제징용피해자) 4명 중에서 3명은 13년 8개월이라는 긴 싸움을 진행하는 동안 별이 되셨다.
2019년 1월, 우리나라 대법원은 배상하지 않을 경우 신일철주금의 한국 재산을 압류하겠다는 결정문을 승인했다. 동년 7월 일본 외무성은 압류 결정문을 인정할 수 없다며 반송시켰다. 2020년 6월, 우리나라 대법원은 신일철주금에 압류 실행에 대한 공시송달을 결정했고, 2020년 8월 4일 공시송달의 효력이 발생했다. 그러나 신일철주금은 항고장을 제출했다.
강제징용 전범기업 신일철주금의 배상 문제가 한일 갈등으로 번질 예정이다. 이제는 한 서린 과거를 억울함의 호소가 아닌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다가가 보자.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일본, 強制動員問題解決と過去清算のための共同行動)에서 발행한 팸플릿과 호사카 유지 교수의 저서 <신친일파>(2020)를 바탕으로, 한국의 '징용공'(강제징용 피해자) 문제에 대해 우리도 알고 있어야 할 5가지 포인트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Point 1. 징용공이란 무엇인가?
'징용공' 개념 정리
모집, 관 알선, 징용의 형태로 탄광∙군수공장에 강제동원 된 사람들을 뜻한다. 그 수는 약 80만 명에 이르며 급료 미지급, 강제 저금, 구속, 감시, 혹사, 학대 등이 횡행했다.
강제징용 기간 개념 정리
<신친일파>(2020)에 의하면 1939년 9월부터는 조선인 '모집' 기간이고, 1942년 2월부터는 '관 알선' 기간이며, 1944년 9월부터 1945년 4월까지가 강제 징용 기간이다.
이 때문에, 일본의 우파들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4월까지 약 8개월만 '징용'이고, 그 이전에 행하여진 '모집'과 '관 알선'은 강제연행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자발적으로 참여한 일본행이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법률상 강제성', '서류상 강제성'이 아니다. 계약상 자발적으로 일본에 갔다고 할지라도 일본의 작업장에서의 조선인들의 노역 현장은 노예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모집'과 '관 알선'도 강제 징용으로 보고 있다.
노역 현장은 어땠는가?
노역 현장이 어땠는지가 가장 중요한 검토 사항이다. 근무(노동) 시간은 하루 평균 14~15시간으로 혹사당했다. 미이케 탄광의 경우, "기숙사는 가시철사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했다. 지하 깊숙한 곳에서 노동을 하면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작업을 게을리하면 기숙사 사무소에서 매질을 당했고, 쪼갠 대나무 위에 무릎을 꿇리고 그 사람의 몸에 묶은 무거운 돌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체벌을 받기도 했다."(<신친일파>, p.42)
<특고월보>를 보면, "1943년 10월 사할린 가네야마 숙소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내지인(일본 본토인) 노무계원(감시원) 등 5명이 도주하려 한 조선인 노동자 2명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구타한 뒤 대들보에 매달게 하는 등의 폭행을 가했는데, 한 명은 죽었고 또 한 명은 중상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조선인 노동자를 살해한 범인 중 한 사람이 '조선인 한 명 죽였다고 해도 별 죄의식이 없는데, 특고경찰이 왜 조사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진술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신친일파>,p.60~61)
홋카이도 몬베츠 시에 있던 스미토모 본사 코노마이 광업소에서도 '문제의 정도가 무겁다고 판단되는 조선인에 대해서는 때려서 혼내줌'이라는 조선인 특별 지도법이 존재했고, 이 지도법은 일본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징용공 월급에서 공제된 내역… 강제저축
다수의 탄광에서는 부상하거나 병을 앓아 쉬게 되면 1/3로 양이 줄어든 결근식을 먹어야 했다. 그리고 도주 방지를 위해 강제 저축이 강행됐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의 "월평균 수입이 76엔 정도였다는데… 그중 63엔은 작업장에서 여러 경비로 공제되었다. 공제된 금액의 내역은 식비와 잡비, 그리고 강제저축이다… 현재로 환산했을 때, 월급 152만 원에서 126만 원이 공제되었다는 이야기이다."(<신친일파>, p.54) 공제된 63엔 중 절반이 강제 저축이었다.
일본인도 저축이 강제됐지만, 13.3%에 불과했다. 하지만 조선인은 61.3%로 일본인보다 훨씬 높았다. 조선인은 도주하거나 중도 퇴직할 경우 적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인의 경우는 만기가 아니더라도 중도 해지가 가능했다. 강제 저축은 동등하게 적용됐으나, 그 내막은 차별로 가득했다.
"탄광에서는 화투와 같은 도박을 오히려 장려했다. 광부의 도주를 방지하는 목적 때문이었다. '특별위안소'를 설치한 이유도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군함도의 '특별위안소'에서는 18세의 조선인 '위안부'가 인생을 비관해서 스스로 목숨믈 끊었다."(<신친일파>, p.67) 조선인 노동자를 위해 끌러 온 조선인 '산업 위안부'. 누가 가해자이며 누가 피해자인가?
4편에 걸쳐 연재된 마츠시로 대본영 지하호에도 노동자들을 위한 '특별위안소'가 설치됐다. 마츠시로 대본영 지하호의 '특별위안소'에 대해서는 다른 편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관련기사]
태평양전쟁 말 일왕의 지하 벙커... 강제노역의 흔적 http://omn.kr/1n49s
밭일 하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 비극의 서막 http://omn.kr/1nic4
"얼마나 죽었는지도 모른다" 한글 새겨진 일본 지하굴의 비극 http://omn.kr/1ni2m
일왕 방공호 짓다가 행방불명된 6명의 조선인 청년들 http://omn.kr/1oi1w
Point 2. '징용공' 판결은 무엇인가?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의 배상문제는 무엇에 대한 배상인가?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에서는 일본 정부의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며 반기를 들었다. 한일청구권협정은 무엇에 대한 협정이고, 이 협정이 무엇을 해결했고 무엇을 해결하지 못했는지를 알아보자.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역사문제는 양국의 민사적, 재정적인 채권채무 관계를 해결하는 것이고,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청구권은 한일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한일청구권협정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불법성 인정이 기본 바탕이 된다. 그러나 청구권협정의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불법적인 식민지 지배를 부인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부인은 강제 동원 피해에 대한 협상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렸다.
왜 일본은 이토록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의 기반이 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 이토록 당당한 것일까? 다음 편에서는 일본이 정부의 입장에 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 '징용공' 판결과 배상② 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광양시민신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