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방면에 걸친 잡다한 지식들을 많이 알고 있다. '잡학다식하다'의 사전적 풀이입니다. 몰라도 별일없는 지식들이지만, 알면 보이지 않던 1cm가 보이죠. 정치에 숨은 1cm를 보여드립니다.[편집자말] |
현재 한국 국회에는 "의원은 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국회법 25조)는 규정이 있을 뿐, 별도의 구체적인 '복장 규정'(dress code)은 없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입은 원피스가 논란이 되자 기사가 쏟아지고 여론은 갈렸다. 그 뒤로 한 달여가 지났지만 그걸로 끝. 의정활동에서 복장은 어떠해야 하는지 혹은 의원 옷차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게 과연 타당한지, 더 이상의 논의는 없다.
이런 가운데 국회의원 복장에 대한 각국 사례를 비교한 국회 입법조사처 보고서가 나와 눈에 띈다. 지난 2일 발간된 <주요국 의회의 의원 복장규정>(이슈와 논점, 정치의회팀 전진영 입법조사관)이 그것이다(
보고서 직접보기).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이번 원피스 논란은 과거 한국은 물론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 등에서도 유사하게 전개돼왔다.
주목할 만한 점은 옷차림 논란이 국가 불문 주로 여성 의원들을 대상으로 제기됐고, 그때마다 '성차별적 논란'이라는 지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1993년 11월 김영삼 정부 당시에도 여성이었던 황산성 환경처 장관이 회의 석상에 바지정장을 입고 나온 뒤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그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답변하자 당시 언론들은 이를 주요 사진으로 실었고, 이는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당시에도 '성차별적'이란 지적이 나왔다. 박완서 소설가는 <경향신문> 칼럼을 통해 이를 '언론의 트집잡기'로 규정했다. 그는 "여성 고위공직자를 보는 언론의 눈은 꼭 미운털 박힌 며느리를 트집잡기로 작정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며 "매일 국회에서 벌어지는 넥타이 맨 양반들 언동을 볼 때 만약 아무나 하나 무작위로 뽑아 집요하게 트집잡기로 작정하면 어떤 사진첩과 어록을 남길까. 틀림없이 가관일 것"이라 썼다(1993년 11월 23일 자 칼럼).
2012년 프랑스, 2017년 미국... 반복된 논란
국회 입법조사처 보고서에 따르면 류호정 의원의 '원피스 논란'과 가장 유사한 사례는 2012년 7월 프랑스의 경우다.
당시 세실 뒤플로(Cécile Duflot) 주택부장관이 새 도시 계획에 대한 연설을 하려 의원들 앞에 나서자, 남성 의원들이 그가 입은 원피스를 보고 휘파람을 불어 논란이 일었다. 당시 사회자는 '조용히 해달라'고 요청했다. 지역 신문인 <더로컬프랑스>(thelocal.fr)는 당시 "원피스를 입었다는 이유로 남성 의원들이 여성 장관을 조롱하고 야유했다"(MPs taunt dress-wearing French minister)라고 이를 비판했다.
2017년 7월 미국 의회 사례도 비슷하다. 당시 한 여성 기자가 민소매 원피스를 입었다는 이유로 의회 로비 출입을 제지당하고 쫓겨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여성 의원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당시 공화당·민주당 소속 여성의원 30여 명은 의사당 계단 앞과 회의장 등에서 매주 민소매 상의·원피스를 입으며 모이는 '민소매 금요일'(Sleeveless Friday) 시위를 벌였다. 당시 시위에 참가한 한 의원은 의회의 '민소매 착용 금지' 관행을 비판하면서 "여성도 맨팔이 드러날 권리가 있다"(women have the right to bare arms)라고 지적했다. 결국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복장의 현대화 필요성을 인정했고, 이는 미국 의회가 민소매 복장을 허용하는 계기가 됐다.
가깝게는 2020년 사건도 있다. 지난 2월, 영국의 트레이시 브라빈(Tracy Brabin) 의원이 옷을 양쪽 어깨에 걸치는 원피스를 입었다가 발언 도중 몸을 기울이면서 오른쪽 어깨가 드러났다. 이를 두고 소셜미디어에서는 '술집 여자' 등 비난이 쏟아졌다.
브라빈은 여유 있게 대응했다. 그는 트위터에 "일일이 답해줄 시간은 없다"면서도 "내가 '술에 취했다'거나, '모유 수유'를 하려는 게 아니었다는 건 확인해줄 수 있다"라고 썼다. 그는 "사람들이 어깨 하나에 이렇게나 감정적이 될줄 누가 알았겠나"라고 적었고, "왜 유독 여성(의원)의 외형만 '평가의 대상'이 되느냐"라고 반문했다. 그는 이틀 뒤 해당 원피스를 경매에 부친 뒤 수익금 전액(약 3100만 원)을 여성단체에 기부해 다시 화제가 됐다.
복장 때문에 벌금을 낸 남성 의원도 있다. 2017년 라 프랑스 앵수미즈(LFI :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소속 프랑수아 뤼팽(François Ruffin) 의원은 본인 지역구 축구팀 유니폼을 입고 본회의장에서 연설했다. 축구 이적료 과세문제에 대한 토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 하원에선 통상 정장을 입어왔기에, 하원은 관습을 어겼다며 뤼팽에게 지급되는 세비에서 벌금조로 약 180만 원(1378유로)을 삭감했다. 프랑스는 이를 계기로 2018년 '중립적이어야 하며, 종교적·상업적이어선 안 된다'는 등 지침을 만들었다.
종교적·상업적 복장 금지한 해외국가들
국회 입법조사처 보고서에 따르면 '재킷을 반드시 입으라'는 등 규정을 정해놓은 영국 의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가에 명문화된 복장 규정을 구체화해 두지는 않았다.
보고서는 "기존 관행에서 벗어난 '예외적 복장'으로 등원했을 때마다 의원 복장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다"라고 평가하면서도, 여러 의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복장 관련 인식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영국·프랑스·독일 의회는 공통으로 '종교적 상징·상업적 광고·정치적 견해'를 포함한 슬로건이나 복장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이는 의원은 발언과 토론을 통해서 의견을 표현해야지, 복장을 그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공통된 인식에 따른 것이다.
이 보고서는 "한국 국회의 경우에도 국회 품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의원 복장이 어떤 복장인지를 명확히 하는 '최소주의적 규정'을 마련해, 국회의 의정활동에서 본질적 문제가 아닌 불필요한 논란을 차단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조언했다. 즉, 국회의원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신발을 신는지 등 의원의 복장이 의정활동의 본질을 흐리게 해선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의원은 말로만 일해야 할까? 특정 계층 이해를 대변하고 사회적 인식을 바꾸어내는 데에 복장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걸까?
"양복과 넥타이는 50대 중년 남성의 대표적 이미지다. 그걸로만 상징되는 국회 관행을 깨고 싶었다. 국회의 권위는 양복이 세우는 게 아니라, 시민을 위해 일할 때 세워지는 것이다."
류호정 의원은 논란이 된 옷을 입은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이어진 논란에 대해서도 "국회는 내 일터다. 성희롱적 시선 등 여성들이 일터에서 겪는 일을 저 또한 겪고 있다고 본다"며 이를 여성혐오·청년혐오로 규정했다(
관련기사 보기). 발언이 아닌 복장으로 메시지를 낸 것이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3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류 의원 원피스는 특별한 복장도 아니었다. 다만 국회가 그간 남성 주류인 공간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불필요한 논란이었다고 본다"며 "의원의 복장 규정이 꼭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국회가 복장과 관련한 허용의 폭을 더 넓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