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수정 : 6일 오후 2시 17분]
'위안부'라고 하면 군 위안부를 제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군 위안부는 중일전쟁 및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점령지나 주둔지에 끌려와 성을 착취당한 여성들을 뜻한다.
'위안부'에는 산업 위안부도 존재한다. 중일전쟁 및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측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기지 생산에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동자의 도주를 방지하고, 일본인 여성들을 강간 등의 성폭력범죄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을 대고 위안소를 만들었다. 산업 위안부는 이 과정에서 일본에 끌려와 성을 착취당한 여성들을 뜻한다.
산업 위안부와 강제징용은 서로 얽혀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제국주의 만행 속에서 한국 국민이 겪어야 했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대본영의 산업 위안소의 흔적은 '또 하나의 역사관'에서 느낄 수 있다. '또 하나의 역사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행 속 역사의 발자취 - 나가노편 ⑤>를 참고해 주길 바란다.
[관련 기사]
일본 '위안소' 벽과 마루를 직접 만져볼 수 있는 곳 (http://omn.kr/1oty1)
본 기사는 나가노시에 있는 마쓰시로 대본영 지하호(松代大本営地下壕, 아래 '대본영')에 얽힌 '산업 위안소'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다룬다. 후술하는 내용은 현장 답사와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정리했다.
일본시민단체 '또 하나의 역사관·마쓰시로' 운영위원회의 전문 해설과 책자('또 하나의 역사관·마쓰시로' 운영위원회 자체 출판)를 바탕으로 했다. 또, 아래 이어지는 고인 고자와씨의 증언은 '또 하나의 역사관·마쓰시로' 운영위원회 통해 기록된 내용을 참고했다.
'국책'이라는 명목 아래 제공한 '위안소' 건물
1944년 가을, 대본영 공사를 위한 '조선인 노무자용 숙소'가 만들어지고, 3~4명의 20세 전후의 젊은 조선인 여성들이 '위안부'로 끌려왔다. 마을에서는 일본인 매춘부를 '다루마(ダルマ, 오뚜기)'라고 불렀는데, 대본영의 조선인 위안부도 같은 은어로 불렸다.
자료에 따르면, '대본영'에 설치된 위안소는 조선인 작업반장(하급 관리인)이 이용했다. 일반 조선인 징용자(하급 노동자)는 위안소 근처에도 오지 못했다고 알려졌다.
작업반장은 강제징용자 중에서 선별했는지, 아니면 다른 루트로 채용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조선인 작업반장은 조선인 노동자와 허술한 숙소를 함께 사용했다. 대본영에 지어진 조선인 강제징용자의 숙소는 <나가노 여행 속 역사의 발자취②>를 참고해 주길 바란다.
[관련 기사]
밭일 하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 비극의 서막 (http://omn.kr/1nic4)
대본영의 '위안소' 로 사용된 건물은 1937년 롯코샤(六工社, 민간 증기 제실 공장) 여성 직원들(노동자)의 휴게실 및 누에 방이었다. 여성 직원들은 이곳에서 탁구 치기, 영화감상 등을 하며 휴식을 취했다.
그 후, 롯코샤의 휴게실과 그 부지를 고자와(兒澤)씨가 구매했다. 고자와씨는 휴게실 옆에 본채를 새로 건축하여 본채에서 가족과 생활하고, 휴게실은 별채로 사용하였다. 별채(휴게실)의 용도는 누에 방이었다.
'또 하나의 역사관·마쓰시로' 운영위원회의 관련 기록에 따르면, 1944년 10월 마쓰시로에 무언가가 건설된다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경찰관이 고자와씨를 찾아와 별채를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고자와 씨의 증언에 의하면 다음의 대화가 오갔다고 한다.
첫날
경찰관 : 현(県)의 정책으로 노동봉사자가 55~60명 정도 올 예정이니, 이곳(별채)을 빌려주지 않겠소?
고자와 : 무슨 용도로 사용되는 거요?
경찰관 : 조선인 노동자가 올 거니까 오락 설치로…
고자와 : 누구에게든 빌려주고 싶진 않은데요.
둘째 날
(경찰관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고자와 씨에게 건물 대여를 요청했다.)
고자와 : 오락 설치라고 하시는데 구체적으로 뭘 설치한다는 건지 알기 쉽게 말해 주십시오.
경찰관 : 조선인 노동자가 들어와서 마을 부녀자에게 손을 대지 않도록, 위안부를 데리고 올 예정이오.
고자와 : 절대 싫소.
셋째 날
경찰관 : 이렇게 요청하는데, 당신은 '국책'에 협력할 수 없는 거요?
('국책'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은 '민족 반역자'에 해당하므로 고자와씨는 어쩔 수 없이 별채 사용을 허락한다.)
고자와 : 대신 집에 아들과 딸이 있으니까, 본채에서 별채가 보이는 큰 유리창을 보이지 않도록 처리해 주십시오.
특수 간호사가 될 수 있다고 해서 왔는데
'위안소'가 결정되자, 조선인 마담과 4명의 어린 조선인 소녀(위안부)들 그리고 포주(남성)가 고자와씨의 별채로 들어왔다. 위안부 중, 경남 농촌 출신의 가네모토 쥰코(金本順子)라는 일본인 이름이 붙여진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읍사무소 직원으로부터 '특수 간호사가 될 수 있다'라는 말에 마쓰시로(일본 나가노시)로 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마쓰시로에 와서 한 일은 간호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녀들은 마담을 '하루야마(ハルヤマ)'라고 불렀다. 마담에게는 아들 1명, 딸 2명이 있었는데, 고자와씨의 아이들과도 같이 놀곤 했다. 정월이면 조선인 위안부가 고자와씨네 가족에게 한국 요리를 만들어 가져와 주었다고 한다. 고자와씨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의 히지모찌(菱餅) 같았다고 하니, 아마도 무지개떡을 만들어 돌린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위안소'(고자와씨네 별채)에는 조선 말로 마시고 노는 소리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패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루야마(조선인 마담)는 위안부로 끌려온 소녀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시모노세키(下関)에서 고자와씨에게 보낸 엽서 한 통이 그들의 마지막 소식이었다고 한다.
강제징용 전범기업 신일철주금의 배상 문제가 한일관계에 큰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9월 24일에 문재인 대통령과 스가 총리와의 전화회담에서도 강제징용 문제가 언급됐다. 한국이 의국장인 한중일 정상회의에 있어 스가 총리의 참석 여부와 함께 강제징용 문제가 언급되고 있다.
일본 언론은 지난 9월 30일 '신일철주금의 자본을 현금화 안 한다는 확약 없이는 스가 총리가 방한을 할 순 없다'는 게 일본 정부 측의 입장이라는 보도를 내놨다. 다음날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진심어린 사과 없이는 스가 총리가 방한할 일 없을 것 같다'라는 요지의 글을 자신의 SNS에 올린 바 있다.
앞으로 한일 관계에서 끊임없이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언급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함께,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도 함께 기억해 주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광양시민신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