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일본 외무성이 독일어로 된 자국 입장문을 올렸다. 베를린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코리아협의회(Korea Verband)'가 설치한 '평화의 소녀상' 철거 문제에 관해서다. 이 입장문은 10월 21일에 일본어와 영어로 된 입장 표명과 내용이 같다. 일본 외무성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입장(慰安婦問題についての我が国の取組)'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문서엔 다음 세 가지 사항을 부정하고 있다.
1. 강제연행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발표한 자료 중에는 군과 관법에 의한 이른바 강제 연행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기술은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입장은 예를 들어 1997년 12월 16일에 내각회의에서 결정한 답변서에 명확히 기재되어 있다. )
2. 성노예
성노예라는 표현은 사실에 반하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은 2015년 12월 한일합의 때 한국 측도 확인하였고, 한일합의에서도 (성노예라는 표현은) 일절 사용되지 않았다.
3. 위안부 수에 관한 20만 명이었다는 표현
20만 명이라는 수자는 구체적 근거가 뒷받침되지 않은 숫자다. 위안부의 총인원수에 대해서는, 1993년 8월 4일 정부 조사 결과의 보고서에서 기술하고 있는 바와 같이 발표된 자료로는 위안부의 총수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으며, 또 이것을 추측할만한 자료도 없으므로, 위안부의 총수를 확인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어렵다.
강제연행에 대한 증거 자료는 없는 것일까?
하야시 히로부미 교수의 저서 <전범재판의 연구(戦犯裁判の研究)>(2010)에 의하면, 2007년 4월 일본의 비영리단체 '일본의 전쟁책임 자료센터(日本の戦争責任資料センター)'는 위안부 강제연행에 관한 증거자료를 발표했다.
아베 내각과 스가 내각에서는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강제는 없었다' 혹은 '공문서에는 강제 연행에 관한 내용이 직접적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공문서에 '강제연행'이란 단어가 직접적으로 기술돼 있지 않다고 해서 강제연행을 부인하는 것은 일본 정부의 억지다.
도쿄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전범자들을 심판하는 재판)에서 네덜란드∙중국∙프랑스 3개국의 검사단에 의해 총 7개의 '위안부'에 관한 증거서류가 나왔다. 실제로 도쿄재판에서 '여공(女工)'으로 속여서 '위안부'로 강제 연행된 사실이 인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검사 측은 네덜란드 여성의 피해를 중심으로, 중국 검사 측은 중국 여성의 피해를 중심으로 증거자료를 제출했다.
그러면, 한국 여성들의 피해가 기록된 공문서는 없는 걸까? 호사카 유지 교수의 저서 <신친일파>(2020)에 의하면 1944년 10월, 미국 전시정보국 심리작전반이 작성한 '일본인 포로 심문 보고서 제49호'(아래 보고서)를 공문서로 꼽을 수 있다. 보고서에는 '간호업'으로 위장한 취업 사기, 즉 강제연행에 대한 증언이 기술돼 있다. 이런 취업사기는 유괴와 납치에 가까웠다.
일본군의 의뢰인이 위안 서비스를 할 여인을 모집하기 위해 조선에 도착했다. 서비스의 내용은 부상병 위문이나 간호를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장병을 즐겁게 해 주는 일로 소개됐다. 의뢰인들은 다액의 수입, 가족 부채의 면제, 고되지 않은 노동, 신천지 싱가포르에서의 신생활을 미끼로 제공했다.
많은 여성이 그 허위의 설명을 믿고 전차금(前借金, 가불금)을 받고 응모했다. 그들 중 몇몇은 이전부터 매춘업에 종사해 왔지만, 대부분은 무지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받은 전차금의 크기에 따라 6개월 또는 1년간 군의 규칙과 위안소 업주에 묶었다. - 호사카 유지 <신친일파>(2020) 제1장, 재인용
'성노예'라는 표현은 사실에 반하는가?
도쿄재판 기록에 의하면, 당시 자카르타에서 식당을 경영하던 아오치 와시오(青地鷲雄)는 일본군정 간부로부터 식당 안쪽에 민간인용(일본인) 위안소를 만들 것을 지시받았다. 민간인용 위안소였지만, 군정부의 지시 아래 만들어졌기에 넓은 의미에서는 '위안소'였다. 당시 네덜란드 여성 20명 정도가 위안부로 끌려왔으며, 소녀들이 성매매를 거부하고자 하면 '헌병대에 알리겠다'라며 지속적으로 협박했다. 혁박속에 이뤄진 성매매는 이들이 '성노예'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여성들도 협박 속에서 성매매를 강요당했다. 보고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은 고액의 전차금을 받고 출항했다. 여성들은 전차금을 빌미로 한 협박 속에서 계약기간이 끝나거나 혹은 전차금을 모두 갚을 때까지 '성노예'로 지내야 했다.
위안부 20만명은 터무니없는 수치인가?
전쟁에 참전했던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水木しげる)가 '위안소'를 직접 목격하고 그린 전쟁 만화 <군종위안부(従軍慰安婦)>를 보면, 위안부 한 명당 80~100명의 군인이 줄서있다. 영화 <귀향>에서도 위안부 소녀 한 명당 약 100명의 군인들이 줄서있다. 실제로 병사 100명당 '위안부' 한 명 비율이라는 문서가 존재한다.
1939년 4월 15일, 육군성 과장 회의 문서 '가네하라 세쓰조(金原節三) 업무일지'에는 "성병 예방을 등을 위해 병사 100명당 1명의 비율로 위안부를 수입한다"라고 적혀있다. - 호사카 유지 <신친일파> (2020) 제4장, 재인용
통계를 보면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징병된 일본군은 380만 명이었다. 병사 수를 100명으로 나누면 1년에 3만8000명이다. 위안부의 경우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2년 정도에 교체됐다. 대략 일 년에 한 번씩 교체됐다고 추산하면, 연행된 위안부는 산술적으로 30만4000명 정도다. 그러니 20만 명이라는 수치는 추정 가능하다.
일본은 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민감한가?
일본은 강제징용∙징병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특히 민감하다. '위안부'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한다. 지난 칼럼 <
일본 '위안소' 벽과 마루를 직접 만져볼 수 있는 곳>(http://omn.kr/1oty1)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은 식민침략 불법행위다.
일본은 성(性)에 대해 폐쇄적인 사회다. 시모가와 고시(下川 耿史)의 저서 <에로틱한 일본사(エロティック日本史)>(1993)에 의하면, 일본은 개항 당시 서양인들에게 개방적인 성문화에 대해 비난을 받았다. 일본은 근대화할 때, 서양의 기준에 맞춰 문화 인식도 변화시켰다. 서양에 비난받았던 개방적인 성(性)문화는 자연스럽게 금기시됐다. 근대에 만들어진 성(性)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현대에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문화적 맥락에서 생각하면 위안부 문제는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수치스러운 역사 문제라 할 수 있다.
독일 내 '평화의 소녀상' 철거 문제는 '성폭력' 개념이 적용돼 거시적인 논쟁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동안 한일 양국의 문제로 치부해 온 위안부 문제가 세계적인 이슈가 된 기회라고도 할 수 있다. 독일의 입장 표명만 기다릴 것 아니라, 지금의 기회를 이용해 전 세계에 우리의 아픔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광양시민신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