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 나왔어요. 오셔서 보세요'라는 문자가 아침을 깨웠다. 무료급식 봉사활동이 있는 날이라 일어나긴 해야 되는데, 요 며칠 힘들었는지 입술에 물집이 생기고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그런데 출판사의 문자가 늘어져 있던 내 몸을 일으키는 강력 비타민제가 되었다.
나이 들수록 시간의 속도는 나이 숫자처럼 달린다고 했다. 코로나가 가세된 일상은 속도의 빠르기도 그렇지만 그 형태마저도 불규칙하기만 했다. 너희 인간이 얼마나 새 환경에 적응하는지 두고 보련다 하는 것처럼 무심히 시간은 가고 허약한 이들은 갈팡질팡하며 살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로 인해 내가 가진 시간의 여유는 적지 않았다. 그 이익의 결과도 작지 않았다. 코로나 발생 초반에 있었던 일터에서의 혼란과 대학생인 두 아이들의 부적응도 잠시 뿐이었다. 가정경제가 잠시 마비되는 위기를 벗어나도록 마음의 평화를 준 큰 사건이 있었다.
작년 가을부터 지역의 작은 서점 살리기 프로그램 중 하나로 에세이 쓰기를 하고 있었다. 책 읽기 좋아하고 글쓰기에 도전하고 싶은 사람들이 혼자는 두려우니 함께 가자라는 맘으로 시작했다. 나도 역시 지역의 인생 후배들과 함께 글을 쓰고 싶었다. 역시 시작이 반이었다.
연초에 에세이 팀의 상주작가 배지영씨가 제안했다.
"선생님들, 우리 그동안 쓴 글 모아서 책 한 권씩 만들까요? 아니, 각자의 책을 만들어보시게요. 모음집 말고요."
"책을 벌써 만들 수 있을까요? 글감도 부족하고. 책은 독자가 읽어줘야 하는데, 누가 읽어줄까요?"
회원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데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언제 또 시작 할 수 있으랴. 이 나이에. 물 들어올 때 배 띄우라고 했으니. 도와주는 사람들 있을 때 무조건 해야지. 어떻게든 되겠지.'
내가 만약 책을 쓴다면 주제는 오로지 '엄마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팔순을 앞둔 엄마에게 꼭 선물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칠순 되던 해 암을 판정 받고 '다 나으면 칠순 잔치상 받으마' 했지만 다음해 돌아가셨다.
그 일이 내 맘에서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 되었다. 엄마의 팔순을 앞두고 뭔가를 해드리고 싶었다. 해학과 지혜 그리고 감성이 들어있는 엄마의 말씨를 모아서 글로 쓰고, 책으로 만들어 드리기로 결정했다.
작년부터 써왔던 15꼭지의 글을 다시 수정하고 추가했다. 책이 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분량이 필요할까? 즐겁게 읽었던 에세이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글과 그림의 구성형태도 보았다.
딸 지원이가 그림 그리는 취미가 있어서, 내 글에 들어갈 그림을 딸에게 부탁했다. 할머니의 말과 마음을 잘 이해하는 손녀딸이었다. 적어도 글감수를 10꼭지 더 써야겠다 생각했다. 형제들에게 책의 내용과 목표를 얘기하니 모두가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역시 우리 집 대빵은 누나여. 인쇄비 걱정 말고 글 잘 써서 우리도 대대손손 물려주게요. 족보가 뭐 별거요. 누나가 엄마 아버지 얘기 써서 남겨주면 족보지."
추가되는 내용으로 엄마와 자식 편을 넣었다. 큰 딸로서 내가 바라보는 동생들의 이야기와 마음을 담았다. 동생들은 만날 때마다 책을 잘 쓰고 있는지 궁금해 했다. 나이 오십 줄에 앉은 동생들이 어릴 적 얘기로 웃고 울고 할 때마다 나는 세월의 강물로 요리하는 여신이 된 것 같았다. 책 한 권으로 내 부모와 형제들이 행복할 수 있음이 너무도 감개무량했다.
나의 첫 책 <어부마님, 울엄마>는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엄마의 결혼 전 이야기, 엄마와 아버지가 해로한 이야기, 텃밭 가꾸며 시를 짓는 엄마 이야기, 어부마님의 요리 이야기, 그리고 오형제를 낳은 엄마와 자식들 이야기로 되어 있다. 총 25꼭지의 글로 구성했으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마무리 했다(저자 이름은 필명 박모니카를 사용했다).
글마다 적절하게 딸이 그려준 수채화 그림이 20여 점이나 된다. 할머니 이야기를 쓰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딸은 "엄마,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매일 고기만 잡았을까. 새벽을 뚫고 나오는 태양을 보면서 젊은 날의 사랑과 희망도 주고 받았을 거 같아"라며 상상하면서 표지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런 딸의 해석이 사랑스러웠다.
현실에 묻혀 두 분의 고생만 생각했던 나와 달리 손녀딸이 바라본 두 분은 태양보다 밝고 찬란한 희망이었다. 딸의 그림 덕분에 내 책을 본 지인들의 칭찬이 쏟아졌다. 글보다 그림을 먼저보고 '참 따뜻하고 좋네요. 이야기도 그러겠지요"라고 말해주었다.
"10월의 마지막 밤, 신인 지역작가들의 출판기념회를 할 거예요. 시장님, 국회의원님도 오시고요. 여러분의 책을 홍보할 배너광고안을 보내주세요. 작가 소개와 로그라인(이야기의 방향을 설명하는 한 문장. 한 문장으로 요약된 줄거리) 써주세요."
상주작가의 메시지에 부지런히 움직였다. 로그라인 글로 이렇게 썼다.
글쓰기로 가문을 활짝 열고 싶은 딸, 감성과 지혜로 80여년을 살아온 친정엄마.
"엄마, 우리 스토리텔링 족보 만들어볼까요?"
나의 이야기 기차는 출발했다. 타고난 능력은 부족하지만 함께 사는 사람들의 축복 덕분에 순항의 길로 들어섰다. 전업작가의 길을 갈 자신은 없다. 그러나 내 소소한 일상을 글로 써서 함께 나누고 싶은 재주는 많다. 특별히 따뜻한 글을 쓰고 싶다.
누군가에게 언제나 위로와 희망을 주는 글을 남기고 싶다. 글로 돈을 벌 욕심도 없다. 단지 글로서 벌 수 있는 돈이 있다면 소외된 사회 이웃과 모두 나누고 싶다. 그것이 내가 잘 할 수 있는 재능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수고해주신 많은 지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마지막으로 내 책의 또 다른 역할을 소개한다. "여러분이 한 권을 사시면 겨울철 연탄을 쓰는 분들에게 하루의 따뜻한 난방이 제공됩니다", "본 책의 판매가의 20%는 소외계층을 위한 기부금으로 사용됩니다"라고 하루 종일 지인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마지막으로, 함께 책을 만든 10명의 신인 작가들에게도 여러분들의 사랑을 갈구하고 싶다.
10월 31일 토요일 저녁 7시, 한길문고에서 지역작가 11인이 날개를 달고 날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