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시작하고 몇 명의 내담자를 만났다. 연번부터 상담 시간까지 보고를 위해 잊지 않으려고 그날그날 상담 일지를 작성했다.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기록이 잘 되었는지 점검하다 보니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상담에 소요된 시간을 적는 칸은 있는데 상담 날짜를 기록하는 칸이 없었다. 한 상담자가 두 번 오는 경우 그들이 온 날짜가 기록되어 있어야 구분이 될 것 같았고, 오류를 잡아낸 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일지를 새로 만들려고 어떤 순서로 정리하면 좋을지 생각하며 적어놓은 일지를 차분하게 다시 들여다보는 순간이었다. 황당한 착각에 어이가 없었다. 또박또박 글자도 반듯하게 상담자의 이름이 적힌 칸의 맨 위쪽에 분명 '상담 일시'라고 적혀 있었다. 이런 실수를, 그럼 이름은 또 어디에 적으라고? 물음을 갖는 순간 '성명'이라고 적힌 칸이 보였고 거기에 당당하게 성별을 적어 놓았던 것이다.
속으로 많이 당황했지만 조용히 수습했다. 나이 듦의 신호로 생각했다. 사실 이번 사건 말고도 나이가 드는 사인을 그동안 여러 채널로 접수하곤 했다. 막힘 없이 매끈하게 흐르듯 나오던 말이 순간 막혔던 일. 당황해서 했던 말의 흐름도 잊어버렸던 일. 등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일부러 횡설수설한 것처럼 엉터리로 마무리했던 일도 벌써 5년쯤 전이었던 것 같다.
이후로도 늘 쓰던 단어가 기억이 안 나서 주변의 정황을 들어 이야기를 연결해 보려고 노력했던 일은 많이 있었다. 어린 꼬마들도 잘 따라 하는 '핫한' 가수의 노랫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벌써 오래되었고, 여러 세대가 함께하는 대화에서 시차를 둔 깨달음을 어설픈 웃음으로 무마하기도 했다.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한 노력
길을 걷다 보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술술 이어지는 때가 있다. 꼭 기억했다가 글의 소재로 써야지, 했던 것들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까맣게 잊는다.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아 아깝지만 놓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았는지. 다행히 옆에 누군가와 같이 얘기했던 상황이라면 그날의 기억을 물어 글의 소재를 간신히 찾는 경우도 있다.
이런 나의 상황을 잘 알기 때문에 나는 길을 걷다 자주 멈춘다. 무언가가 떠오르는 즉시 메모하기 위해서다. 다이어리가 있으면 다이어리에, 없으면 휴대폰 메모장에 정황과 함께 떠오른 것을 낱말로 끊어 짧게 적는다.
<메모의 기술>(사카토 켄지)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메모하라, 주위 사람들을 관찰하라, 기호와 암호를 활용하라, 중요 사항은 한눈에 띄게 하라, 메모하는 시간을 따로 마련하라, 메모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라, 메모를 재활용하라"라고 메모의 기술 7가지를 말한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하다 보니 메모가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쓰고 있는 다이어리는 제법 사이즈가 큰 것이어서 주로 집에서 그날 하루를 정리하며 활용한다. 메모의 기술에서 말하는 '언제 어디서든 메모하라'는 말과 '중요 사항은 한눈에 띄게 하라'는 정도는 나름 잘 실천하는 부분 같기도 하다. 특별한 요령 없이 마구 적어서 깔끔하지도, 누구에게 보여줄 만하지도 않지만 다이어리를 열면 당시의 상황이나 생각이 연결되어 떠오르니 적어도 나 자신만은 알아볼 수 있는 방식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다이어리를 끝까지 지속적으로 쓴 기억이 없었지만, 올해는 연초에 딸이 사 준 다이어리를 꽤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다. 한 달의 메모를 기록하는 곳과 하루의 메모를 기록하는 곳은 이미 빈 틈이 없다. 사라지는 기억력을 살리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흔적 같기도 하고 열심히 산 노력의 증거 같기도 해서 나름 보람이 있다.
더 나은 노년을 꿈꾼다면
살아가며 순간순간 이전과 다른 나를 발견한다. 특히 요즘의 변화는 두렵기까지 하다. 아침에 몸을 일으킬 때 굳은 다리가 바로 곧게 펴지지 않는다. 어깨 선이 분명한 옷을 입어도 둥글게 접힌 어깨가 사진을 통해 거짓 없이 보일 때나 돌아가신 어머니의 노년을 닮은 나의 움직임은 당황스러움의 단계를 넘어서고 있는 중이다. 이젠 나이 듦을 억지로라도 수용하려고 하고 불편한 내색을 덜 하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나이 듦에 관하여>(루이즈 애런슨)에서 저자는 오늘날 사회가 갖고 있는 노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사지가 멀쩡한 왕년의 유명인사도 늙으면 결국 평범한 동네 할아버지가 되기 십상"이라 표현한다. 현실이 이러니 나이 듦이 절대 자연스러울 수 없다. 자존감도 무너지고 새로 마주하는 나의 굼뜬 모습은 충격을 넘어 공포를 동반하기도 한다.
우리가 노년에 접어들었을 때 인간성을 스스로 포기하지만 않았다면 나이 듦을 묘사하는 다양한 말들이 아무리 우리를 시험해도 슬퍼하거나 애통해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루이즈 애런슨, <나이 듦에 관하여> 중)
몸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내가 지닌 생각도 쓸데없이 견고한 틀에 갇힌 고집은 아닐까 점검한다. 나의 말들이 노파심으로 비치지 않기 위해 말을 조심하고 줄이려고 애쓴다. 정돈된 생각을 말하려고 하고, 아이들과 소통할 때 그들의 생각과 너무 동떨어지지 않도록 그들 세대를 이해하고 수용하려고 한다.
더 나은 노년을 원한다면 축복받은 노년기를 목표로 정해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면 된다. 눈앞에 펼쳐진 무한한 자유를 잡을지 놓을지는 우리의 선택일 뿐이다.
가장 눈부셨던 청춘을 지나 중년으로, 그리고 다시 노년으로 저물어 가는 사람의 일생에서 능력이 쇠퇴하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이유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중년기와 청년기 위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생은 젊어서 죽거나 나이가 드는 것, 두 가지 가능성만 제공한다. (루이즈 애런슨, <나이 듦에 관하여> 중)
나이 듦을 따로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당연히 지금까지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살아온 경험에서 쌓인 데이터를 통해 앞으로의 변화는 조금 더 잘 만들어갈 수 있다고 용기를 내고 싶다.
삶은 편안해졌고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발목을 잡는다는 생각도 떨쳐 버린다. 시작하기에 늦은 시간은 없고 변화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내담자들에게 해준 격려의 말들을 내게도 적용하며 힘을 내어 본다.
점점 더 나이가 들어갈 것이다. '상담 일자'를 '상담자'로 보고 당당히 기록하고, '성명'을 '성별'로 자연스럽게 적는 것 같은 실수가 앞으로 또 어디서든 발견될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을 습관적으로 긍정해주며 나이가 들고 싶진 않다. 어떤 모습이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실수를 거듭하며 성장하는 젊은이들처럼 실수를 발판으로 여전히 성장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나는 나를 위로하고 격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