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을 얼게 한다던 소한 추위가 사나흘 기승을 부렸다. 코로나19로 집에서 할 일을 찾아가며 생활하는 건 도가 텄다 싶었건만, 폭설까지 더해져 옴짝달싹을 못 하고 갇혀 지내자니 좀이 쑤셔댔다.
지난 11일 주말보다는 날이 풀린 데다 '더는 갑갑해서 못 살겠다' 아우성을 치다 외출을 감행했다. 큰맘 먹고 나선 곳은 충남 공주시 오일장이 서는 장터. 에너지 충전소라도 되는 양 우울할 때나 기분이 처칠 때 장에만 갔다 오면 이상하게 만병통치약을 처방받은 듯 활력이 샘솟는다.
쌓였던 눈이 녹으면서 볕 드는 시장 바닥은 흙먼지와 눈이 한데 섞여 질척인다. 얼음이 꽝꽝 언 음지 쪽도 자칫 한눈을 팔았다가는 앞으로든 뒤로든 엎어지기 십상이다. 이래저래 조심해야 할 판이었다.
군데군데 낯익은 상인들이 안 보였다. 궁금하여 물어보니,
"날이 푹해졌다고는 해도 과일하고 채소는 이 추위에 금세 얼어버리니 안 나오쥬."
불 쬐던 상인이 답을 준다. '몸이 상할까 봐 안 나온 게 아니었구나!' 수년간 장에 나와 봤지만, 건성건성 돌아다니느라 이제껏 장사하는 이들의 속사정을 알아채지 못했다. 눈여겨 제대로 살피니, 채소전이나 과일상은 채소나 과일 위에 투명 비닐을 이불마냥 덮어 놓고 있다.
시원하게 답을 해준 나물 장수 아주머니는 차디찬 손을 비벼가며 난롯불을 다시 쬐기 시작한다. 사방이 트여 칼바람이 흩날리는 장 바닥에 굽 낮은 플라스틱 의자 하나 놓고 앉아 언 몸을 녹인다.
깡통을 뒤집어 얹힌 난로 위에서 미끈하게 잘생긴 고구마가 익어간다. 이웃 상인들과 나눠 마실 노란 주전자 속 커피물도 끓어 간다. 시장에선 어느 때보다 불조심이 강조되는 시기지만, 이마저도 못 쓰게 한다면 너무도 가혹한 처사가 아닐까 싶다.
털장갑 한 짝을 놓고 간 손님이 다녀간 뒤 한참이 지나도록 다음 손님은 들지 않았다. 나물 장수 아주머니는 쓸데없는 질문만 던지고 서 있는 손님 같지 않은 손님에게 싫은 내색이 없다. 수지맞는 장사가 돼야 할 텐데. 좋은 사람인 걸 알고 나니 괜스레 마음이 쓰였다.
자리를 이동해 얼마를 걸어가니 나물 장수 아주머니네 난로와 얼추 비슷한 게 보인다. 오후 3시를 조금 넘겨서 해(日)도 안 빠진 시간인데,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는 좌판을 걷고 있다. 꺼진 난로 덕에 확신이 들자,
"벌써 가시게요?"
물으니, 갖고 온 건 다 팔았단다.
"뭐 파셨는데요?"
"귤유."
과일이 얼까봐 장에 안 나온 과일 장수들이 많다 보니, 추위에 귤 상자 짊어지고 나온 아저씨는 다행히도 파는 재미가 쏠쏠했던가 보다.
늘상 마지막으로 들르는 골목에 들어섰다. 이곳도 이번 장날은 거르는 상인들이 족히 절반은 돼 보였다. 큰 이문이야 남겠냐마는 동장군 맹위에도 굴하지 않고 좌판을 벌인 분들은 들고 온 장사 보따리는 한결 줄여서 집으로 돌아갈테니 참! 다행이다.
상인들 이런저런 사정 헤아리기는 추위에 장 보러 나온 다른 손님들도 매한가지였다.
"조금이라도 깎고 싶은데, 추위에 벌벌 떨고 계신 걸 보니 목구멍에서 말이 안 나오네요."
시금치 몇 줌을 검은 봉지에 담고 계산을 하며, 젊은 손님이 농담 반 진담 반 우스갯소리를 던지더니 자리를 뜬다.
신년을 맞아 처음으로 장 구경을 하고 왔다. 춥다고 이불 속에만 웅크리고 있었더라면 천금을 주고도 얻지 못할 삶의 지혜와 용기를 덤처럼 품에다 꾹꾹 담아 왔다. 한 며칠은 펄펄 날아다닐 수 있는 나만의 비밀 처방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