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왔다. 한 해 농사가 끝났다. 지난 늦은 봄, 내가 사는 아파트 근거리 마을에 땅을 살 때 계획은, 바로 한편에 집을 짓고 엄마 아빠가 귀농하는 것이었다. 앞마당에서 밭농사 짓고 가까이서 서로 케어하며 지내려고 한 것이었다.
어찌어찌해서 상황이 여의치 않아 집 짓는 일은 기약이 없어지게 됐으니 밭농사를 시작하면서 엄마 아빠의 고속도로 출퇴근도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그날그날의 농자재를 차에 싣고 말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지만 팔순 노인들이 왕복 4시간을 고속도로 운전을 하니 내 걱정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일단 별 탈 없이 한 해 농사가 마무리되어서 다행이다.
이 밭에서 우리 손을 거쳐 나고 자란 감사한 농작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고구마, 콩, 배추, 무까지. 내 친구들에게도 나누어 주고 식탁에 올라오기까지 그간의 사계절 풍경들이 함께 떠올랐다. 그중 으뜸은 원두막 점심과 새참 시간이었다.
맛있고 힘 나는 찬을 준비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여름에는 얼음 띄운 콩국수에 냉커피, 가끔은 엄마가 좋아하는 반찬 많은 가정식으로, 또 한 번은 아빠식 붂음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바람 끝이 선선해지면 각종 부글부글 찌개를 끓였고, 고기반찬은 내가 먹고 싶어서라도 꼭 마련했다. 새참으로는 단팥빵, 호빵과 사철 과일들. 나도 참 부지런히 해 날랐다.
양파와 마늘을 심어놓고 고구마 수확을 하고 김장 배추를 뽑고 나면 사실상 밭농사는 할 일이 없다. 못 먹을 배추들만 나뒹굴고 땅은 꽁꽁 얼었다. 농한기 농부는 따듯한 아랫목 구들장에서 한 해 뭉친 근육을 겨우내 잘 풀어줘야 한다. 한의원 침도 맞으며 다음 농사를 위해 몸뚱이를 어지간히 고쳐놓아야 한다. 다시 쉬지 않고 몸을 써야 할 날이 두세 달 남짓이라는 걸 아니까. 한 해가 다르게 몸이 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아니까.
딸 퇴직금으로 산 밭이니 아빠에겐 이만한 금싸라기가 없다. 겨울이라고 놀리기는 아까우셨나 보다. 고구마 캘 때 알았다. "이거 다 캐면 이 자리에다 비닐하우스를 지을겨." 돈 아끼시려고 자재를 고물상에서 아름아름 싸게 모으신 데다 인건비 안 들이려고 우리 식구끼리 직접 지었다. 사실 거의 엄마 아빠 둘이 다 지었다.
비닐하우스 짓는 과정을 처음 보았다. 비닐하우스가 생긴 것은 심플하니 철 파이프를 꽂아 세우고 비닐 씌우면 되는 거 아닌가 했는데 모양새와는 다르게 품과 자재가 많이 든다는 걸 알았다.
엄마 아빠는 여름에는 새벽 5시에 출발한다. 해가 짧아질수록 아빠의 출근은 늦어지고 일찍 서둘러 올라가야 해서 점점 하루 작업량이 줄어들었다. 그러니 몇 날 며칠 동안 작업을 했고 드디어 지난주에 문을 달고 모든 작업이 끝났다.
아빠는 평생 땅에서 지어지는 모든 농사일은 물론이고 가축 농장에다 공장일에도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다. 여전히 각종 장비를 잘 다루고 기운도 젊은 남자 못지않아서 감탄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아빠의 부지런함 때문에 늙은 엄마의 수고로움도 늘어나는 것이라, 엄마는 나에게 이따금 아빠 흉을 본다.
"당최, 네 아부지는 가만히 있지를 않아. 내가 어떨 땐 너무 힘들고 귀찮아."
"엄마는 힘들다고 하고 좀 셔~ 엄마가 중요하지."
"어떻게 가만히 있니? 네 아부지 혼자 저렇게 일하는데."
제일 먼저 한 일은 화분에 있던 귤나무 6그루를 비닐하우스 가운데에 한 줄로 옮겨 심은 것이다. 비닐만 씌워도 벌써 아늑한데 과일 달린 나무가 있으니 마치 설국열차 온실칸 같다. 준공식 기념으로 흰 면장갑 끼고 오색 테이프 커팅을 하고 싶었지만 대신 삼겹살 파티를 했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구워 먹는 삼겹살 맛은 이 세상 맛이라고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계획대로 이사했더라면 엄마 아빠가 사는 동네가 되었을 이 낯선 마을에 드나든 지도 한 해가 지나간다. 원두막 짓느라 첫 삽을 뜨던 때가 생각났다. 처음 보는 이방인에게 마을 어르신이라면 누구나 가던 길을 멈추고 똑같은 말을 하던 그 날 말이다.
"누구슈?"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 가족은 누구누구이며를 매번 똑같이 미래의 이웃들에게 설명하는 일도 나의 몫이다. 여기에 집 짓고 이 마을로 이사 올 거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우리 소개가 끝나면 나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싹싹함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사실, 대화라고 할 것도 없다. 하나만 여쭤봐도 그저 세상 기쁜 표정으로 자녀분들 이야기를 하셨다. 나의 맞장구에 경계심도 풀어졌다. 묻지 않은 마을 이야기까지 하시는 게 시골 어르신들 특징이다. 이렇게 낯을 익혀놓으면 삭막하지 않아서 나는 그게 좋다. 물론 다음번에도 "누구슈?" 하고 지난번처럼 처음 본다는 표정의 할머니도 계셨다.
"아이고, 늙고 힘들어서 농사 못 헌다고 시골마다 땅을 내놓는다는데, 시상... 팔순 너머에 농사를 한다고 그걸 또 사는 사람이 있네. 아부지한테 늙어 편하게 사시라구 그랴. 머더러 힘들게 농사를... 쯧쯧. 농사 지긋지긋 혀."
아빠의 흰머리만 봐도 혀가 찰 노릇이데 나이까지 알고 나면 저절로 나오는 걱정이었다. 이 마을은 공기 좋고 조용하니 살기 좋다는, 모두 똑같은 말씀에 나도 공감이 되었다.
이장님과는 인사를 했지만 마을 집집마다 인사할 수는 없고 만날 수 있는 마을 분이라도 친해져야지 하는 생각에 바나나를 여유 있게 준비해 간 것은 잘한 것 같다. 어디나 그렇듯 이 마을도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농사일을 할 수 있는 노인, 농사일할 수 없는 노인. 고령화도 아니고 초고령화 시대를 실감했다.
눈이 내리고 나서 밭에 갔을 때는 고라니가 우리보다 먼저 다녀간 것을 발자국으로 알 수 있었다. 산 쪽으로만 쳐놓은 울타리를 돌고 돌아 우리 원두막까지 찾아온 것이다. 기웃거리다 먹을 게 없어서 지었을 그 표정에는 슬픔이, 돌아가는 외줄 발자국에는 설움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
보리 싹은 이미 지난번에 얼추 뜯어먹었다. 아빠는 울타리를 더 쳐야겠다고 말했다. 고라니에 감정 이입이 된 나는 그냥 못 들은 척했다. 엄마가 아빠 험담하듯, 나도 속삭이며 엄마에게만 말했다.
"엄마, 얘네도 먹구 살어야지. 굶어 죽으면 불쌍하잖아. 산짐승이라도 잘 뜯어먹었으면 됐지 뭐.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욕하려나?"
"저거 저렇게 싹을 뜯어 없애놔서 안 자라믄 어쩐다니... 어찌할 수 없지만서도..."
공존과 개입이라는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얼마큼, 그리고 어디까지가 아름다운 선일까? 며칠 강력 한파에 그 고라니가 문득 생각난다.
삼겹살 식사가 끝나고 젓가락 내려놓기 무섭게 아빠는 여느 때처럼 또 1분도 쉬지 않고 바로 일을 한다. "아빠는 일하라 하고 엄마는 천천히 더 먹고 쉬었다가 일하셔."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말뿐.
귤나무를 피해서 비닐하우스 안에 로터리 작업을 했다. 여기에다 다음에 시금치를 심을 것이다. 겨울 시금치는 맛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