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제주소년들이 바닷가를 바라보며 미래를 그리고 꿈을 키웠으리라. 나 또한 제주도의 바닷가를 마주하며 노래하고 뛰놀던 제주소년이었다. 현무암 갯바위에 앉아 바닷바람을 맞고 있노라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시절, 해안가 곳곳에 나 있던 '구멍'들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다. 너무나도 어렸기에, 그 작은 동굴들이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상흔일 줄 상상조차 못했다. 뒤늦게 알게 된 것이지만, 제주도 해안의 그 부자연스런 동굴들은 신의 뜻이 아닌 전쟁의 광기가 빚어낸 역사의 상처였다.
전국민이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며 '일억옥쇄'를 부르짖던 제국 일본은, 제주도 해안에도 이른바 '해안특공기지'를 구축하고 자폭보트 '신요(震洋)'를 배치했다. 제주도 바다엔 그들이 도사리던 동굴만이 남았을 뿐. 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자폭'마저 각오했던 그 사람들의 전쟁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파악하기 쉽지가 않다. '징용'과 '위안부'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당시의 전쟁이 거듭 호명되는 현 시점에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 걸까.
'조국 헌신'이라는 기치 아래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1월 말의 도쿄. 요카렌(해군비행예과연습생) 출신의 기시 우이치(岸卯一, 96)씨와의 면담이 어렵게 성사됐다. '요카렌'이란 구 일본 해군의 항공사관 양성 제도로, '가미카제'로 대표되는 전쟁말기의 '특공'에 이 요카렌 출신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제주도 해안에 배치됐던 상기의 자폭보트 '신요'의 운용에도 기시 우이치씨가 속했던 요카렌 출신들이 대거 동원됐다. 오늘날의 동아시아 질서에까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산증인, 기시 우이치씨는 본인의 '전쟁 체험'을 담담하게 회고했다.
"요카렌에 지원한 건 1943년이었어요. 전쟁이 가장... 그런 때였지요."
1943년. 팽창만을 거듭하던 제국 일본이 미드웨이와 과달카날에서 미군에게 대패를 거듭하며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던 시기였지만, 18세의 기시 우이치씨와 주변 친구들은 그때까지의 승전보에 도취돼 있었다.
지원을 장려하는 포스터들이 어린 청년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어려서부터 '천황 폐하와 조국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배워왔던 그는 부모님 몰래 해군 요카렌 시험에 응시했다. 결과는 합격. '대일본제국 해군' 명의로 최종통지가 집으로 통보되고 나서야, 부모님은 기시 우이치씨의 요카렌 지원 사실을 알게 됐다.
"부모님은 뒤늦게 영장을 보시고 그저 눈물만 흘리셨어요. 그치만 이미 입영날짜까지 결정된 마당에, 돌이킬 방법도 없었지요."
'따귀'는 면할 수 있었던 까닭
기시 우이치씨는 누나로부터 '무사귀환'을 기원하며 천 개의 바느질을 수놓은 '천인침'을 받고 집을 나섰다. 자부심을 품고서 시작한 요카렌 생활. 그러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고된 훈련과 가혹한 환경에 그는 '정말 큰일날 곳에 들어왔구나' 하고 기겁하기에 이른다.
오전 5시 반에 기상해 조례와 체조로 하루를 시작했고, 바다에서 본격적인 훈련이 진행됐다. 특히 보트의 노는 기시 우이치씨에게 있어 너무나도 무거운 것이었다. 다른 조의 보트보다 뒤처지게 되면 '눈이 핑핑 돌게 되는 큰일'을 당하게 됐다.
그에게 가장 괴로웠던 훈련은, 원형상자 안에 매달려 회전을 감내하는 훈련이었다. 이는 항공기의 선회 속에서 평형감각을 유지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의 온갖 고난들을 나열하며, 그는 "겨우 18, 19살밖에 안된 인간들에게 요카렌 훈련은 너무나도 힘든 것이었지요"라고 술회한다.
군기를 잡기 위한 '빠따' 구타도 일상적으로 자행됐지만 '모두가 맞는' 단체 생활이었기에 불만조차 품지 못했다. 그나마 육군과는 달리 외국에 나가는 해군 요카렌의 특성상, '상한 얼굴'을 보일 수 없다는 이유로 따귀는 면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힘든 교육과정 속에서, 7개 단추의 요카렌 제복은 그의 긍지였다.
신호가 끊어졌다... 영원한 이별
기시 우이치씨는 전투기 조종사를 희망했다. 하지만 전황의 악화로 이미 일본의 항공기 수는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던 시점이었다. "선배 요카렌들은 몰라도 우리는 전쟁의 쓰임에 맞지 않게 됐어요."
그는 결국 통신 병과로 배정받게 됐다. 야마구치 현에 있는 통신학교에서, 당시로써는 고난도 기술의 영역이었던 통신 기술 숙달을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다. 기시 우이치씨는 당시의 일정을 구 일본해군의 군가를 인용해 '월월화수목금금'으로 표현했다. 즉, 주중에 쉴 수 있는 여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 이렇듯 바쁜 일정 속에서,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그는 본래 2년 과정인 통신학교를 1년 만에 '졸업 당하고' 1944년 실전에 배치되기에 이른다.
치바현 가토리 항공기지에서 근무하며 온갖 교신 내용들을 다루게 된 기시 우이치씨는, 붕괴돼 가던 조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목도한다. 국민들에게는 기밀에 부쳐지던 각지의 패전 소식들이 모스부호를 타고 그의 손에 전해졌다. 사전에 탐지한 적기에게 반격조차 못하고 무력하게 공습 당하는 현실이 그의 눈 앞에 펼쳐졌다. 본인은 공습으로부터 무사했지만, 적지 않은 병력들이 미군기의 습격 속에서 죽거나 다쳤다.
'특공'을 명받고 기지에서 출격한 가미카제들의 최후를 지켜보는 것 역시 그의 임무였다. 출격하는 가미카제들을 전송하는 자리에서 그는 언제나 슬픔을 참을 수 없었다. '영원한 이별'임을 알았기 때문에 모두 눈물을 흘렸다. 활주로를 떠난 기체들과 항공기지의 교신을 통신병 기시 우이치씨는 마지막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적함에 돌진'하기 직전 아군기에서 보내는 신호가 끊어지면, 눈물로 전송했던 특공대가 전사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과연 스스로 '천황'과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치길 희망했던 것일까.
가벼운 목숨
기시 우이치씨는 "특공 지원이 형식적으로는 지원의 형태였지만, 사실상 손을 들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음을 증언했다. 그가 증언하는 특공대원들의 심정은 슬픔과 체념에 가까웠다. 그는 이때의 시대상에 대해 거듭 '교육의 무서움'을 이야기했다. 전황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음을 알아도,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아도, '특공'나 '옥쇄'를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가미카제 특공조차 항공기 부족이 더욱 극단적으로 심화됨에 따라 한계에 봉착하게 됐다. 기시 우이치씨는 가미카제 대신 '인간어뢰' 카이텐이나 신요로 몰렸던 장병들의 예를 들며 '어디로 명령받을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전쟁은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폭주 기관차와 같았다.
그는 차마 입밖에 내지 못했지만 '이 전쟁은 이미 글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싸우지 않으면 안될' 사회적 분위기를 개인이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는 것뿐이었다.
비극의 시대에 인간의 목숨은 한없이 가벼웠다. 기시 우이치씨는 전쟁 당시 목숨을 잃은 전우들의 사례를 설명하다가 비행훈련 중 사고로 추락사한 교육생의 경우를 기억해냈다.
그의 상관은 사고를 안타까워하면서도 '기합이 빠지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라고 훈시했다. 함께 교육을 받았던 전우 5명이 '전함 야마토'에 탑승했다가 전사한 사례 역시 그의 기억에는 충격으로 남아 있다. '불침전함'으로 선전되며 일본국민들의 자긍심을 표상하던 전함 야마토는 모두가 선망하던 근무지였다.
그 야마토 전함에 탑승한 전우들은, 야마토 전함이 미군기의 공습을 받고 허망하게 격침되면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1945년 4월, 전함 야마토가 오키나와로 출동하던 중 일어난 일이었다. 기시 우이치씨는 "4천여 명의 승조원 중 구조된 것은 겨우 200명 정도였다"라고 한 뒤 말을 잇지 못했다.
"전쟁은 해선 안 될 일입니다"
결국 제국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천황의 명의로 항복선언을 발표한다. 기시 우이치씨는 이미 기지 교신 내용을 통해 8월 10일 무렵부터 일본이 곧 항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패전한다는 사실에 거부감 같은 것은 없었는지 질문하자 그는 "전쟁이 끝나 다행"이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정말 무의미한 전쟁이었네요."
맹목적인 교육 속에서 군국소년으로 자라나 전쟁에 자원해나갔던 그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불합리와 참상을 마주하며 그때의 전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체험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살아 숨쉬던 인격체가 폭력으로 사라지게 되는 극단 위에서, 그 어떤 대의명분도 호소력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비 내리는 거리를 걷는 길. "전쟁이란 것은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라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던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