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나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보여주면 안 돼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온한 주말 아침. 늦은 아침을 먹고 우린 영화를 소개해주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이때 한참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딸아이가 내게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니 보여달라고 졸랐다.
난 당연히 딸아이와 내가 함께 좋아하는 영화 장르인 상어나 괴수가 나오는 영화 중에 우리가 보지 못한 영화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딸아이와 난 코로나 유행 전 <메가로돈>, <크롤>, <고질라> 같은 영화를 둘이서 영화관에 가서 찾아 볼 정도로 즐겨봤다. 그 정도로 좋아하는 장르다.
"아빠, 나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보여주면 안 돼요"
"그래? 무슨 영환데. 새로 개봉했어?"
"아니, 아마 VOD 검색하면 나올 거 같은데. 아빠도 알 거예요. <아바타>."
"<아바타>? 어떤 장르의 영화인지는 아는 거지? 꽤 오래전 영환데."
"응, 알아요. 재미있다는 얘길 많이 들어서."
딸아이가 보여달라고 했던 영화는 11년 전에 개봉했던 <아바타>였다. 나도 예전에 영화관에서 보고 TV 영화 채널에서 나올 때는 제대로 본 적이 없으니 <아바타>를 다시 보는 건 11년 만이었다. 바로 VOD 영화 검색을 해서 영화를 찾았다.
아바타는 2009년 12월에 개봉했던 작품이고, 지금부터 11년 전에 난 3살 된 딸아이를 데리고 영화관을 찾았었다. 큰아이는 집에 처남과 함께 있었고, 둘째 딸아이는 너무 어려서 아이를 데리고 갔다. 당시 <아바타>는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 사이에서 열풍을 일으켰다. 영화라면 사족을 못 쓰던 나는 <아바타>를 개봉관에서 꼭 봐야 한다는 생각에 영화관을 찾았다.
둘째 아이가 워낙 얌전했고, 일부러 낮잠을 자는 시간에 맞춰서 예매를 했기 때문에 나름 얄팍한 잔꾀를 부려봤다. 그렇게 합리화를 해봐도 지금 생각해도 3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SF 장르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고, 무리였다.
티켓을 끊고 입장할 때부터 매표 직원에게 조금은 눈총을 받았지만 그 매서운 시선을 무시하고 우린 상영관으로 입장했다. 처음 입장할 때부터 조금 긴장했지만 딸아이가 크게 놀라는 눈치가 아니어서 잠시 동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금세 영화는 시작되었고, 모든 조명이 꺼지면서 놓았던 마음은 다시 긴장을 시작했고, 마음 한편으로는 조금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도 했었다. 딸아이가 조용히 감상하거나, 혹은 잠을 자기를.
불이 꺼지며 딸아이는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영화가 시작하면서 차츰 조용해졌고, 다행스럽게도 딸아이는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그리도 원했던 꿈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딸아이가 잠이 들면서 나와 아내는 오롯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고, 난 그렇게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가져봤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내 욕심이었고, 딸아이는 고작해야 세 살이었다는 것을 너무 간과하고 있었다.
영화는 어느새 중반부를 넘어서 '나비족'과 '인간'간의 전투신으로 치달았다. 이렇게 터지고, 부수는 장면에서 조용히 넘어갈 리가 만무했다. 영화관은 입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라 시설들이 훌륭했고, 음향 시설 또한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웅장했다.
결국 딸아이는 잠에서 깨고 말았고, 아이에게는 정신없이 터져대는 시끄러운 소리와 지나가는 화면 영상이 정말 무서웠을 것이다. 딸아이는 울음을 터트렸고, 부모와 함께 영화를 보러 온 아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관람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난 딸아이를 안고 맨 뒤쪽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아이의 상태를 보면서 바로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고, 영화관 맨 뒤쪽에 서서 아이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다행히 안고 있어서 그런지 딸아이는 얌전히 내 가슴에 안겨 함께 영화를 봤고, 다시 자리에 앉을 용기가 없어서 결국 맨 뒤쪽에 서서 영화를 끝까지 관람했다. 한 시간을 넘게 서 있었지만, 고맙게도 딸아이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11년 전 우여곡절 끝에 딸아이와 처음 봤던 영화였는데 오늘 그 영화를 딸아이와 제대로 다시 봤다. 자신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짱구>를 틀어놓고도 한 손의 스마트폰은 놓지 않는 녀석인데 오늘 아바타를 보는 내내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 않을 정도로 제대로 몰입해서 봤다.
처음에 영화의 러닝타임이 160분인 것을 보고 한 번에 다 못 볼 것 같다고 하더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우린 끝까지 내달렸다. 결국 11년 만에 영화 <아바타>를 정주행 했다. 딸아이는 꼭 영화 평점을 줘야 한다고 하면서 별점 5개, 만점을 줬다. 정말 재미있게 본 것 같아서 내 기분도 덩달아 '업' 되는 것 같은 하루였다.
딸아이와 나의 시간은 무려 33년 차이가 있다. 마냥 어린 딸로만 남아있을 것 같았던 딸아이도 어느덧 열다섯이 되었고, 이제는 내가 좋아하던 영화, 내가 좋아하던 음악을 함께 보고, 함께 듣는다. 흘러가는 세월이 마냥 슬플 것 같지만 그런 시간들 속에 찾아보면 여러 가지 즐거움들이 생겨난다. 이렇게 아이들이 성장하고,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취미나 시간들이 늘어나는 것도 살아가면서 생긴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몇 년 전 밖에서 아이들과 외식할 때 옆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를 하던 가족이 생각이 난다. 우리 가족 구성원과 같은 4인 가족이었고, 스무 살이 갓 넘은 딸과 아들을 둔 따뜻해 보이는 가족이었다. 그 가족은 아빠로 보이는 남자분이 두 아이들에게 맥주 한 잔씩을 따라주며 함께 단란하게 식사와 함께 술을 마셨는데 그 모습이 너무 따뜻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난 언제 우리 아이들과 그런 시간을 보낼까 생각하며 은근히 부러움을 표시했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제 그런 부러움이 현실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일 년만 지나면 아들하고도, 5년만 지나면 딸아이하고도 밖에서 맥주 한 잔은 가능한 나이가 될 테니 그 또한 즐거운 일이 될 것 같다. 그 시간이 조금은 많이 기대된다. 세월 가는 게 마냥 두렵고, 아쉽지만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난 오늘도 늘어가는 주름살과 흰머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랫동안 내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는 즐거운 계획을 하나씩 늘려가고 있다. 내 마음과 정신의 근육을 단련해가며 난 오늘을 그렇게 살아간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