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남편은 시댁엘 갔다. 아침, 남편이 시어머니와 전화 통화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나도 오라고 하시는 것 같았지만 남편이 적절히 거절한 듯 보였다. 잠시 같이 갈까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참았다. (시댁은 워낙 신정을 지내고 구정엔 친정에 가는데, 올해는 '코로나19' 방역 수칙 준수와 아이의 쾌유를 위해 아무 데도 가지 않기로 남편과 합의를 본 상태였다.)
그러고도 마음은 갈팡질팡했다. 온 가족이 같이 가서 조금은 피곤하겠지만 사람 사는 온기를 느끼는 건 어떨까. 아니다, 어떻게 얻은 자유 시간인데, 혼자 집에 남아 조금은 쓸쓸하고 외롭더라도 온전한 자유를 만끽해야지. 어떤 선택도 완전할 순 없다.
아이가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정적의 뉘앙스는 바뀐다. 집안 가득 볕이 들이쳤지만 생기는 사라졌다. 모든 사물이 일순간 조금 울적에 보였다. 하지만 그 안에도 고독의 편안함이라는 게 있다. 무얼해야 좋을까 잠시 방황했다. 당장 읽어야 하는 카프카의 소설이 있지만, 답답하고 머리 아픈 소설을 읽기엔 아까웠다. 정말 정말 하고 싶었던 일, 나 혼자 만끽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었다.
우선 커다란 감자칩 한 봉지와 읽고 싶었지만 미뤄둔 책 한 권을 들고 와 소파에 양반다리로 앉았다. 한 봉지를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요란하게 소릴 내며 씹어 먹었다(아이와 있으면 과자는 가능한 먹지 않고 먹더라도 적당량을 덜어 먹는다). 설렁설렁 책장을 넘기며. 손가락에 묻은 부스러기과 소금기까지 쪽쪽 빨아가며(아이에겐 못하게 하는 행동이다) 먹어 치웠다. 만족스러웠다. 과자 한 봉지를 죄책감 없이 먹어 치우고 은근한 기쁨을 느끼는 내가 어린 아이같았다.
바삭한 스낵을 와그작거리며 씹는 일은 나만의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 중 하나다. 가끔은 포만감보다 저작 활동이 더 큰 만족감을 주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주기적(?)으로 과자 한 봉지를 씹는다. 이때 필요한 건 마르고 단단하고, 바스라지는 칩이나 스낵이다. 원없이 씹고 나야 해소되는 무언가가 있다.
이런 습관 뒤에 알 수 없는 불만족이나 감정적 취약함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스로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감정을 '과자 한 봉지'가 즐겁게 해소해준다면 이 정도의 의존은 허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존재일 수 밖에 없으니까.
안 좋은 습관을 완전히 제거하는 게 꼭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체로 나는 '기호'에 너그러운 편이었다. 아빠가 담배를 피울 때도 한 번도 끊길 바란 적이 없고, 날마다 소주를 반주 삼아 드실 때도 절주나 금주를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남편이 담배를 피우겠다고 하면 두 손 들고 말릴 것 같기는 하다.)
고기를 좋아하는 남편의 식습관을 존중하고, 끼니를 반드시 밥으로 챙겨 먹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다. 스스로가 밥보다 빵이나 면을 더 즐기고, 밥은 걸러도 디저트는 먹는 이상한 기호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책 한 권을 읽고 즐겨 마시는 술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그 마음을 접었다. 예전처럼 과하게 마시는 일도 없고(슬프게도 숙취를 감당할 수 있는 체력이 사라졌다) 이젠 적당선에서 중단할 수 있는 힘도 있다. 그런데도 굳이 술을 끊겠다는 건 내 삶에서 좋아하는 것 하나를 지워버리는 일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마시는 와인 한두 잔은 건강한 식습관이나 자기 절제력(통제력)과는 또 다른 의미로 가치가 있다. 와인 속에 담긴 미묘하고 복잡한 맛과 향을 즐기는 자체도 즐겁고, 그런 와인이 시간과 관계 속에 불어넣는 여유와 풍성함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한여름 차갑게 마시는 맥주 한 캔은 어떤가. 그게 없다면 나에게 여름은 김빠진 사이다가 될 것 같다.
감자칩 봉지 바닥에 고인 부스러기까지 한데 모아 입안에 털어 넣었다. 후련했다. 문득 초콜릿 아이스크림 한 통을 앉은 자리에서 다 먹어 치우거나, 과자 한 봉지를 신나게 씹어 먹는 일이 '와비사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비사비'란 불완전함의 미학을 나타내는 일본의 문화적 전통 미의식 또는 미적 관념의 하나이다. 이에 대해 다룬 잡지에서 완벽함 대신 일부러 여백과 미세한 흠집을 허용하기도 한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지나친 완벽보단 부족한 대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긍정하는 가치로 읽혔다. 때로는 어떤 흠이 대상에 숨결을 불어 넣기도 한다고. 한 번씩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마음껏 먹는 습관은 여러모로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자 애쓰는 날들 속에 몰래 숨겨 놓는 '틈' 같은 것이다. 그 틈이 지나친 '완벽지향'으로 경직되려는 자아에 본질적인 부족함을 용인하는 너그러움이 되어 주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는 건 지나친 자기 합리화일까나.
매일 아침 빈속에 머그컵 한가득 내린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주말이면 기름진 음식과 와인 한두 잔을 곁들이는 일상을 사랑한다. 좋아하는 TV 프로그램 한 두 개를 빼놓지 않고 챙겨 보는 일도 그렇다. '절대로 안 돼'라는 건 없었으면 한다.
나에게 허용하는 '틈'을 통해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너그러워지는 법을 배우는지도 모른다. 물론 지나침과 적당함 사이의 줄다리기는 늘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한쪽으로 기울어지더라도 그 반동으로 다시 튀어 올라오는 시소처럼, 제자리를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괜찮다. 어제 과자 한 봉지를 입속으로 털어 넣었기에 오늘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걸 이젠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