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자'(서울포기자)라는 신조어가 생겼다고 합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는 서울 집값에 치여, 혹은 더 좋은 주거 여건을 찾아 서울을 탈출해 집을 구한 사람들을 부르는 말인데요. 서울 천만 인구도 이젠 옛말이라는데 이 표현, 곱씹을수록 좀 묘합니다. '서포자'라는 단어 속에는, 서울에 사는 건 당연하고 그 외의 지역에서 사는 건 예외적인 일이라는 인식이 담겨있는 것 같거든요. 어쩌면 서포자는 서울 중심적인 한국 사회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단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 중심 사회'에 대한 청년 시민기자들의 솔직한 생각을 들어봅니다. [편집자말] |
그날 나는 길을 헤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일부러 앞만 보고 걸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순간, 모든 사람들이 내가 이방인이라는 걸 알아챌 것만 같았다. 기차에서 내려 붐비는 지하철로 갈아탔을 때, 큰 백팩을 메고 있는 나를 사람들은 쏘아봤다. 손에 들린 쇼핑백에서 새어 나오는 김치 냄새에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내쉬는 숨에도 혹여 무엇이 섞여 있을까, 누군가 그것을 알아챌까봐 신경이 쓰였다.
"이번에 내리실 역은 노량진, 노량진역입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이 아니었다. 지방의 작은 소도시, 그곳이 나의 고향이었다. 큰 가방을 등에 메고 양 손 가득 짐을 든 채 노량진 다리를 건널 때 처음으로 억울했다. 왜 난 서울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까.
그저 벗어나고 싶기만 했던 첫 서울살이
그전까지 나는 내가 태어난 곳에 만족하며 살았다. 고3 시절 수시로도, 정시로도 '인 서울'에 실패했을 때에도 크게 낙심하지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우스갯소리로 들었던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서울에 괜스레 거리를 뒀었다.
하지만 목표 없이 졸업을 목전에 둔 대학 4학년에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려면 노량진에 가야만 하는 줄 알았다.
다니는 학원 바로 앞 고시원을 구했다. 그곳에선 창문 있는 방과 없는 방의 월세가 5만 원 차이 났다. 그나마도 창문의 모양을 흉내냈을 뿐 제 구실을 못했다. 화장실은 공용이고, 라면과 밥이 무제한 제공되었다. 1평 남짓한 방, 침대에 누워 손을 뻗으면 책상이 잡혔다.
옆 방과의 사이에는 벽 대신 스티로폼이 있었다. 작은 기침소리에도 방문 앞에는 포스트잇이 붙었다. 딱 1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년만 버티자는 생각으로 그 방을 계약했다. 수험생활은 계획보다 길어졌고 하루도 못 살 것 같았던 그 방에서 나는 2년을 넘게 살았다.
합격 후 나는 서울로 발령을 받았다. 노량진에 이어 두 번째 서울살이가 시작됐다. 고시원에 살 때 한 번도 그곳이 나의 '집'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서울에서 산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그곳은 그저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공간에 불과했다. 서울에 직장이 있으면 다를 거라 여겼다.
발품을 팔아 집을 구하러 다녔다. 그저 나만의 화장실, 나만의 주방이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7평 남짓한 원룸을 구했다. 가격의 상한선을 정해두고 20곳이 넘는 곳에 발품을 팔아 겨우 구한 방이다. 언덕을 오르고, 계단으로 5층을 더 올라야 하는 곳이지만 대신 해가 잘 든다. 옆 방에서 청소기 돌리는 소리가 가끔 들려오지만 그 정도는 참을 만하다. 작지만 혼자 쓸 수 있는 주방과 화장실도 있다.
나의 집은 도대체 어디일까
7년 전 큰 배낭을 메고, 새어 나오는 김치 냄새를 걱정하며 탔던 지하철을 이제는 매일 탄다. 지하철을 자연스럽게 '지옥철'이라 부르며 사람들과 부대끼며 출퇴근을 하는 게 익숙해졌다.
누군가 붐비는 지하철에 큰 짐을 갖고 타면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서울생활이지만, 여전히 나는 이방인이다. 1평짜리 고시원도, 7평짜리 원룸도 나에겐 '집'이 아니다.
소속감을 느끼고 싶을 때 부모님이 계신 고향집으로 도망을 간다. 그곳엔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시고, 맛있는 집밥이 있고, 변함없는 내 방도 있다. 하지만 포근함도 잠시. 오래 떨어져 지낸 탓에 부모님과의 생활 방식은 많이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혼자 사는 서울 생활이 금세 그리워진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이번엔 얼마나 있다 가?"라며 자연스럽게 묻는다. 그 물음에 대답을 할 때마다 이곳에서도 나는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을 안다.
나의 집은 도대체 어디일까. 서울의 7평 남짓한 원룸일까, 부모님이 계신 고향집일까, 아니면 미래에 꾸미게 될 새로운 가족들이 있는 집일까. 문득 무서워졌다. 평생 나의 집을 찾지 못하는 건 아닐까. 지금처럼 서울에서 도망치고, 고향에서도 도망치며 끝내 이방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끝없는 물음 끝에 두려움을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기로 한다. 앞으로 내 인생을 책임지겠다며 부모님을 떠나 집 밖을 나오던 그 날의 나를. 그때부터 나 자신이 바로 나의 집이었다. 버거운 배낭을 메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위태롭게 서 있던 그곳이 나의 집이었다.
1평 남짓한 고시원에서 불투명한 미래 앞에 불안에 떨고 있던 그곳이 나의 집이었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출근하고 힘 빠져 오르는 언덕길이 나의 집이고, 겨우 7평짜리 원룸이지만 구석구석 나의 취향을 채워놓은 이곳이 나의 집이다. 결국엔 내가 있는 곳이, 나 자신이 나의 집이었다.
이렇게 답을 내리고 보니 어느 곳에서도 나는 이방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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