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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 나무위키
 
조숙하고 영민한 허균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으나 어머니와 누이, 형들의 보살핌으로 굽힘없이 성장하였다. 세도가의 막내이어서 다소 버릇이 없었고 두뇌가 우수함을 과신하여 우월의식을 갖게 되었다. 『논어』와 『통감』은 물론 각종 사서를 읽고 당나라 시를 배웠다.

이 시기 그러니까 누이와 함께 이달에게 글공부하고 어머니와 형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글공부를 할 때가 그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그가 손곡에게서 누이와 함께 시를 배우던 동안이 일생 중에 가장 행복한 때였다고 전해진다. 이 동안에 그는 둘째형을 통하여 사명당을 만나게 되어 불교에 눈뜨기 시작했고, 유성룡의 문하에도 드나들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 시대의 많은 인물들과 접하면서 어린 꿈을 키웠다." (주석 8)

허균의 생애에 이달과 함께 많은 영향을 미친 이는 작은형 허봉이다. 두뇌와 문장에서 동생 못지않았다. 1568년 생원이 되고 1583년 스물다섯 살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허균이 처음으로 어려운 일을 겪은 것은 열다섯 살 때 작은 형 허봉의 귀양살이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글공부와 지인들을 소개시켜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던 그가 1583년 경기도 순무어사로 나갔다가 병조판서 율곡 이이를 탄핵하고 창원부사로 좌천되고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병조판서 이이가 이론만을 앞세우고 군정을 소홀히 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는 호걸풍의 문사였다. 

허봉은 글도 잘 지었지만 술도 잘하는 호인이었다. 그가 옥당(玉堂)에 있을 무렵, 밤이면 선조가 숙직자를 불러다 경사(經史)를 강론케 하고, 반드시 술을 많이 권해서 흠뻑 취하게 만들곤 했다. 술을 많이 마시면 사람들도 혹시나 예의법도를 잃을까 염려해서 머뭇거리며 곧장 마시지는 못했다.

허봉은 대개 큰 잔을 기울였는데, 잔이 돌아오면 거꾸로 뒤집어가며 마셔버렸다. 내시들은 그가 남길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머뭇거리면서 잔을 되돌려 받지 않았지만, 임금은 그가 벌써 다 마신 것을 알고 있었다. (주석 9)

 
 난설헌생가의 사랑채...사랑채에는 교산 허균의 영정도 모셔놓았다. 총명하고 진취적이었으나 이단아로 낙인찍혀 결국 역적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허균. 소설 홍길동전에서 그의 개혁적인 사고의 한 편린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생전에, 불행하게 죽은 누이의 글을 모아 중국과 일본에서 난설헌시집이 발간되게 했으며 난설헌의 시가 칭송을 받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난설헌생가의 사랑채...사랑채에는 교산 허균의 영정도 모셔놓았다. 총명하고 진취적이었으나 이단아로 낙인찍혀 결국 역적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허균. 소설 홍길동전에서 그의 개혁적인 사고의 한 편린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생전에, 불행하게 죽은 누이의 글을 모아 중국과 일본에서 난설헌시집이 발간되게 했으며 난설헌의 시가 칭송을 받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 김숙귀
 
허균에게 이달과 함께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둘째형 허봉은 그와 홍문관의 동기생인 유성룡이 예조판서가 되어 해배를 위해 노력했으나 풀리지 않다가 3년 만인 1585년 영의정인 노수신에 의해 겨우 풀려났다. 성호 이익은 뒷날 허봉에 관해 이렇게 평한다.

첫째, 성격이 곧고 활달하여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바를 굽히지 않았다.
둘째, 임금 앞에서 일을 논할지라도 조금도 굽힘이 없이 자기의 옳은 바를 내세웠다.
셋째, 관의 일을 돌봄에도 명쾌하고 조리가 정연하게 처리하였다.
넷째, 냉철한 이성으로 대간으로서나 어사로서 기강을 바로잡는 데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다섯째, 문장은 전중하고 온아하며 시는 준일하고 호장하였다. (주석 10)


허봉이 아직 조정에 남아 있을 적인 1577년 누이 허난설이 열다섯 나이에 한 살 위인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하였다. 시댁은 5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다. 두 집안 간에는 오랫동안 세교가 있었다. 함께 글공부를 하던 누이를 떠나보내고 허전하기 그지 없었다.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 하평마을, 교산 언덕에 1983년에 세운 허균 시비. 한시 '누실명'이 새겨져 있다.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 하평마을, 교산 언덕에 1983년에 세운 허균 시비. 한시 '누실명'이 새겨져 있다. ⓒ 장호철
 
허난설은 동생과 여섯 살 터울이지만 당대 조선사회에서 여성으로서는 상대를 찾기 쉽지 않은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혼인 뒤 시어머니와의 불화와 방탕한 남편의 생활로 한숨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어야 했다. 이런 일이 허균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었다. 

둘째형이 해배는 되었으나 도성(서울) 출입이 제한되었다. 형은 이후 세속적인 관직이나 욕망을 버리고 산천을 떠돌며 자유로운 생을 살았다. 이 또한 허균에게는 교범이 되었다. 

허봉은 벼슬을 마다하고 온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불교에 골똘히 관심을 쏟았다. 이때에 허균도 불교 책들을 읽고 거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는 때때로 형을 찾아가 인생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학문을 배우기도 했다. 그때가 바로 문장수업에서 학문수업으로 옮겨가던 때였다. 그러나 허균의 인생관이 채 무르익기 전인 스무 살 때에 형이 죽었다.

허봉은 그 높은 기개와 포부 그리고 재질을 지니고서도 불만스런 현실에 저항하면서 스스로를 학대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허균에게는 두 번째 닥친 커다란 불행이었고 절망스런 사건이었다. (주석 11)


허균의 생애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 둘째형의 고난과 누이의 힘겨운 결혼생활은 자유혼과 재기 넘치는 학인으로 성장하던 그에게 정신적인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석
8> 이이화, 『허균』, 63쪽, 한길사, 1997.  
9> 허경진, 앞의 책, 31쪽.
10> 이익, 『성호사설유선(星湖僿設類選)』, 인사문(人事門)
11> 이이화, 앞의 책, 6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허균 #허균평전 #자유인_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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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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