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아빠가 유일하게 스마트폰 검색하는 것은 날씨이다. 여기 밭이 있는, 내가 사는 군산의 날씨다. 감자 심는 날짜 택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전에 밭을 갈아엎는 로터리작업을 해야 한다. 그다음에는 고랑을 만들어 검정 비닐을 씌우고 비 오기 전에 감자를 심어야 한다. 중간에 비가 오면 흙이 질어서 로터리작업이나 고랑 만드는 일이 어려워진다.
작업 당일, 어김없이 아침 대략 8시 정도면 엄마한테 전화가 걸려온다. 밭에 잘 도착했다는 전화였다. 엄마 아빠의 도착을 확인하고는 나도 어서 채비를 챙겨 나가야 할 것 같지만 나는 늘 하듯이 마저 잠을 잔다. 지난밤 늦게 잠들기도 했고, 아직 나는 아침잠이 많다.
나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먹거리 한 짐과 함께 밭에 도착했다. 엄마 아빠는 이미 보리밭 풀매기를 거의 끝냈다. 아침인사로 안아 드리는 것이 나의 밭농사 시작 루틴이다. 그러고는 고라니에게 뜯겼던 보리싹을 먼저 살폈다.
커다란 바람개비 서너 개를 만들어 꽂아놓았더니 확실히 보리풀이 덜 뜯겼다. 보리는 엿기름을 만들어 식혜를 해 먹을 것이다. 보리싹은 살아났지만 그 고라니는 끼니를 채울 곳 한 군데를 잃었으니 굶으며 어딘가를 떠도는 것인지 미안하기도 하다.
원두막이며 비닐하우스며 군데군데 뿌려놓고 간 쥐약에 혹시 밤새 운명한 쥐의 사체가 있나 둘러보았으나 다행히 없었다. 한 해 공들인 메주콩을 무지하게 먹어 치운 작은 녀석이 있었더랬다. 농사라는 게 식물을 다루는 일인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고라니도 쥐도 생각할 일이다. 생명을 기르면서도 생명을 내치기도 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비닐하우스에서 자라고 있는 시금치 싹과 쪽파도 확인했다. 무탈하게 잘 자라고 있어서 마음이 좋다. 펼쳐진 어린 배추 싹들의 녹색은 그 자체로 기분 좋은 배경 음악 같다. 싹들이 스스로 연주하는 전원교향곡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우리가 지구에 등기를 낼 수 있던 건
아빠의 로터리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 감자를 심을 자리다. 엄마와 내가 배추 뽑은 고랑 검정 비닐을 걷어내는 일을 끝내고도 흙들이 뒤집히는 소리가 한창이었다.
아빠는 지금 지구를 갈아엎고 있는 것이다. 약간 감개무량했다. 우리가 지구에 등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엄마 아빠가 안 입고 안 먹고 아낀 노령 연금과 내 영혼을 갈아 넣은 퇴직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늦도록 천진난만했다. 산 아래 마을 꼬마는 세상 물정 알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다 느닷없이 맞닥뜨리는 세상 물정 중에 내가 제일로 신기했던 것 중에 으뜸은 바로 땅에 주인이 있고 그것을 돈 주고 사고판다는 사실이었다. 아. 지구가 따로 주인이 있는 거구나.
지구는 누구 것인가? 지구는 도대체 언제부터 누구의 것이기 시작했을까? 누구는 어떻게 알고 사기만 하면 땅이 대박이 나서 부자가 더 부자가 되는 걸까. 그것이 더 믿기 어려웠다. 농사를 하겠다고 땅을 사서는 농사 대신 버드나무를 심는다니. 신기했다.
"생산 3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
우리에게는 기억하는 교과서 한 문장이 있다. 암기식 교육의 믿지 못할 굉장한 효과 덕분인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바로 답변이 나온다. 그런데 지금 가만히 보면 의문이 든다.
'노동, 자본'과는 다르게 토지는 공기처럼 애초에 있는 것이다. 단지, 소유권이 있다는 것만으로 엄청난 생산의 대가를 가져가는 것이 정당한가? 전기 수도 도로 국방 치안 이런 것들을 공공재라고 하는데, 이것보다 더 중한 공공재가 있다면 인간이 창조하지 않은 공기나 땅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 자본주의도 모르는 소리라고 돌 맞지 싶다. 자본주의라는 말을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자본주의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 그의 국부론의 본질은 국가와 국민이 함께 잘살자는 것이다. 경제학의 창시자이기도 한 그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도 유명하다. 정당한 자본주의는 훌륭한 제도이고 함께 잘 살 수 있는 제도로서 그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누가 봐도 먹고살 만한데, 그런데도 더 가지려고 하면 어떤 면구스러움 같은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많이 가져도 되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는, 현실도 모르는 소리일까. 나라면 내가 더 부자가 되는 것보다 같이 잘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게 더 기분 좋다. 무식하니 도덕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내가 어이없긴 하다. 그렇지만 도덕과 만족은 정말 중요하다.
어쩌면 더 편한 이론이 있긴 하다. 인간은 사이좋게 나누어 가질 리가 없게 진화했다는 이론 말이다. 그게 생존에 유리했다는... 차라리 진화심리학의 영역으로 접근해버리는 것이 마음은 더 편할 것도 같다. 나보다 세상 물정 조금 더 잘 아는 친구가 핀잔을 던질 뿐 더 이상 뒤따르는 논리 따위는 우리에겐 없다.
"모든 지구인이 지구의 주인인데, N분의 일은 아니더라도 그 유사한 방법이라도 있지 않을까? 나눠 가져야 맞지. 왜 몇 명이 많이 가지도록 내버려 둬야 하는 거야?"
"또 그 지구 타령이냐? 그걸 어떻게 나눠 가지냐? 너 이쯤 되면 그거 망상이야."
땅으로 돈 벌지 않는 세상, 정말 불가능할까
그런데 여기, 이 사람을 보라. 은퇴 후 부인과 시골 경북 경산에 내려가 텃밭농사를 하며 여생으로 자유, 자치, 자연 3자주의를 실천하며 평화사상 연구를 하는 분이 있다. 바로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이다.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손꼽는 현대 지식인 중 한 분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에드워드 사이드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걸로 유명하다. 그의 인터뷰 기사를 우연히 보고는 나는 벌떡벌떡 가슴이 뛰었다(
링크). 다음은 한 기사에서 그를 소개하는 부분이다.
"호박, 박, 오이, 고추, 땅콩, 고구마, 들깨 등 다양한 작물들로 인해 600평의 밭이 그다지 넓게 느껴지지 않았다. 600평은 그가 정한 소유의 한계다. 우리 국토에서 경작 가능한 땅을 7천만 인구로 나눴을 때 한 사람에게 300평씩 돌아가는 것으로 계산되자, 자신과 부인 몫을 합한 크기만큼만 땅을 샀다."
"그것 봐. 이런 생각하는 사람 있다니까. 한반도 인구로 나눴다잖아. 내 생각이 망상이 아니었어"라고 나도 모르게 혼자 외쳤다. 희망이 보였고 괜히 신났다. 여하튼, 똑같이 분배하자는 게 아니다. 강력한 부동산 정책이 시행되든, 지구인이 모두 동시에 도덕적으로 변하든, 어떻게 해서든지 토지로는 더 이상 큰돈 버는 게 아니어야 한다는 것, 이게 가능한 세상을 떠올려본다.
꼬마는 이제 세상 물정 아는 어른이 되었다. 부동산 투기는 정보와 재력을 갖춘 기성세대와 기득권들의 독무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정도는 알아버렸다. 슬프다. 부동산값이 자고 일어나면 뛰었다며 영끌하지 않은 자신이 벼락 거지가 되었다는 뉴스들이 들려온다. 그것은 정상이 아니라고, 야만이라고 해설해주는 언론도 찾기 어렵다. 어떤 단어를 써도 불편한 내 심정을 표현하기에 보잘것없을 듯하다. 여전히 생각은 많다.
생각이 많은 사이 아빠는 로터리작업을 마쳤다. 아빠도 지구도 애썼다. 다음에 우리는 하지 감자를 심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