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이 날 때마다 동화 공모전을 알려주는 사이트를 들락거린다. 가끔은 에세이 공모전에도 기웃거린다. 내가 참여할 만한 공모전이 뭐가 있을까. 공모전을 찾아보고 공모전에 글을 보내고 발표를 기다리고. 벌써 3년째다.
공모전에 목매는 사람이 접니다
출판사를 다니다 그만두었다. 덤벙거리는 내 성격에 출판사는 정말이지 최악의 직장이었다. 편집자는 꼼꼼해도 보통 꼼꼼하면 안 된다. 연차에 상관없이 나는 자꾸 실수를 했다. 아이가 보는 조작이 많은 책에 코팅 후가공을 빼먹어 책이 찢어지고, 자연관찰 책에 동물 이름이 잘못 들어가 인쇄 직전에 필름을 갈아 끼웠다.
허둥지둥 뒷처리를 하고 나면 온몸이 쭈그러든다. 퇴근 후, 제작팀에서 전화가 오면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등골이 서늘해진다.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사직서의 이유는 핑계였다. 내가 잘 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게 뭘까. 하기 싫은 일은 바로 알겠는데 하고 싶은 일은 뭔지, 잘하는 일은 뭔지 잘 모르겠다. 그러다 간간이 글을 쓸 때 재미있었던 기억, 칭찬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행 다녀온 경험을 에세이와 동화로 써서 친한 편집자 몇 명에게 보여주었다. 선배들은 모두 수정사항을 줄줄 읊었는데 후배들은 모두 재미있다고 했다. 글을 쓰기 전에 내 인성부터 돌아봐야 하나. 선배들의 조언대로 이렇게 저렇게 콘셉트를 바꾸고 세 꼭지(챕터)를 완성해서 유명 출판사들에 투고했다.
몇 주 지나 모든 출판사에서 거절 메일을 받았다. 몇 달간 뭐한 짓인가 싶었는데 5개월쯤 지나 한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선배는 네 글 보니 동화 잘 쓸 것 같다며 아는 출판사 지인에게 날 추천해 주었다. 부족하지만 뭐라도 끄적이고 주변에 보여주길 잘했다 싶었다. 처음 환경동화를 써서 원고 계약할 때 출판사 직원이 나에게 물었다.
"저, 제가 뭐라고 호칭을 하면 될까요?"
난 조금 고민하는 척하다가 예전부터 듣고 싶던 그 호칭을 내 입으로 말했다.
"뭐, 글을 쓰는 거니까 작가라고 불러주세요."
변명하자면, 달리 불러달라고 할 직함이 없었다. 난 프리랜서라 회사 직급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글 쓰는 거니 '작가'라고 부르는 게 당연한데 그 직원은 왜 그걸 물어보았을까. 나는 왜 그렇게 불러달라고 한 내 입을 원망하고 있을까.
이 사회에서 '작가'라는 호칭의 무게는 작가가 하는 일보다 훨씬 더 무겁고 대단하다. 아마 내가 작가라고 불리는 게 창피한 이유는 내 글의 무게가 그 호칭을 감당하지 못한다 여겨서겠지. 그렇게 잠시라도 작가라고 불리던 시간이 지났다. 아무도 나에게 글을 써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있지 말고 공모전에 응모해보자. 난 이미 글을 써본 경험도 있잖아.'
공모전에 당선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
공모전의 양식에 맞춰 글을 쓰고 주변에 글을 보여주고 글을 몇 번 다듬고, 날짜에 맞춰 글을 보낸다. 그 뒤로는 공모전 발표 날짜를 잊으려고 노력한다. 갑자기 모르는 전화를 받았는데 "축하합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면서.
하지만 발표 날짜는 내 머릿속에 박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발표 날짜가 다가올수록 꼭 당선이 될 것만 같다. 난 당선이 되면 어떤 소감을 말할지 고민한다.
'말 잘 못 하는데 큰일이네. 감사하다고 말할 사람은 미리 생각해 놔야겠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당선 소감이라니 정말 황당하다.'
내 생각은 둘로 나누어져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글을 제대로 첨부해서 보낸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수정 전 버전을 첨부한 건 아닐까. 원고를 보내지 않고 요약본만 써서 보낸 건 아닐까. 덤벙거리는 성격의 소유자인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실수다.
그렇게 오만 생각을 하다 보면 발표일 당일이 된다. 난 두근거리면서 공모전 홈페이지를 열어보지만 그 홈페이지에서 내 이름을 본 적은 없다. 공모전에 당선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사실을 아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공모전에서는 합격자에게 먼저 전화로 연락을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연락을 받지 못했으면 발표 당일 공모전 홈페이지를 열어보며 떨 필요가 없는 거였다.
처음 공모전에서 떨어졌을 때는 꼭 대학에 떨어진 것처럼 우울했다. 난 '땅땅땅! 이 사람은 이제 작가입니다!'라는 판결을 얻고 싶었다. 내가 스스로 작가라고 불러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알아서 작가라고 불러줄 판결.
매일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글을 끄적이는 나의 삶을 명쾌하게 해명해 줄 그런 판결. "내가 매일 비싼 커피 값을 내면서 카페에 가는 이유가 다 있었어. 그 결과물이 바로 이거야"라고 말하고 싶었다.
한참을 우울해하다 마음을 다잡고 동화 쓰기를 배우는 곳에 등록하고 처음부터 자세히 배웠다. 과연 잘 쓰는 사람은 많았다. 난 우물 안 개구리였다. 배우고 나니 다시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데 하필 코로나가 겹쳐 사람들이 집에서 글만 쓰는지 공모전에 응모하는 편수가 확 늘었다. 아, 그 전에 당선 됐어야 했는데.
웃고 있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순간
내 생활은 여전히 공모전 중심으로 흘러간다. 공모전을 검색하고 공모전에 글을 보낸다. 발표 날짜를 기다리며 또 다른 공모전에 응모할 글을 쓴다. 이젠 떨어져도 처음처럼 큰 충격은 없다. 남편은 내 기분이 좀 안 좋다 싶으면 "공모전 떨어졌어?"라고 자연스럽게 묻는다. 그러면서 "언젠간 될 거야"라는 위로를 건넨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죽을 때까지 안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끝내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는 삶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공모전 당선에만 목매달고 있으면 안 되는 거겠지. 내 삶은 공모전 당선만 바라다 죽은 사람으로 요약될테니.
당선이라는 숨 멎는 순간에 집착하지 말고 그냥 매일 쓰자. 매일 글을 쓰는 내 삶이 모여 아직 성취나 성공이 되진 못했지만 이 안에도 나름의 눈물과 웃음이 있다. 그 자체로 반짝이는 순간이다.
저번 주부터 초등학생 아이와 자기 전에 30분씩 책을 읽기로 했다. 무슨 책을 읽을 거냐는 내 말에 아이가 대답했다.
"엄마가 쓴 동화 읽을래. 친구 찾는 얘기."
"엥? 큭큭큭. 그거 공모전에 떨어진 거?"
"난 재밌기만 하더라."
"아. 그래에?"
내 입이 귀에 걸렸다. 웃고 있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빵빠레가 울리는 순간만이 성취가 아니다. 공모전은 많고 그 많은 공모전에 자꾸 떨어지니 내 글도 많이 생겼다. 덕분에 글 부자가 될 것 같다.
떨어진 글들을 엮어 공모전에 대한 책을 한 권 내야지, 생각하며 난 오늘도 글을 쓴다. 이렇게 공모전 당선에 연연하지 않으면 의외로 당선되지 않을까. 하는 모순적인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