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태어났을 무렵은 정치적으로 강력한 전제정치가 구속력을 잃어가고 사상적으로 주자학이 양명학에 의해 도전을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사상․문학․예술부문에서 자유로운 낭만적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특히 서양에서 마테오 리치(1552~1610)가 북경에 최초로 천주교 교회를 세우는 등 동서문화의 접촉도 차츰 활발해지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명말(明末)의 시대적 분위기에 깊은 영향을 받은 동시에 그러한 분위기 형성에 많은 역할을 하면서 분방한 활동과 신산한 삶을 살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천재적인 재질이 있었던 그는 성장하면서 인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6세 때에 복건향시에 합격하여 관리에 등용되고, 34세 때에는 남경국자감 박사, 36세에는 북경국자감에 올랐다. 그러나 관계 진출이 신통치 않은 것은 능력이 출중했음에도 올곧은 성격 때문에 관리로서의 출세가 늦었다. 명조 말기의 부패한 조정의 기강은 뇌물과 아첨이 없이는 승진이 불가능했다.
상관에게 아첨하지 않고 뇌물을 주고받지 않는 그가 출세를 바라기는 어려웠다. 그는 후일 "나는 오직 뇌물을 받지 않음으로 하여 온갖 고생을 해서, 일생 동안 겪은 불운을 쓰라 하면 이 땅덩어리를 먹으로 갈아서 쓴다 해도 다 못 쓸 것이다"라고 토로한 바 있다.
25년 동안의 관리생활을 했지만 얼마나 청빈했든지 장녀는 고생으로 쇠진하였고, 차녀와 삼녀는 굶어서 죽었다. 아들 셋도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었다. 그는 이토록 뇌물과 부패에 철저하게 벽을 쌓고 공과 사를 엄격히 가르며 청렴하게 살았다.
나는 천성이 '높은 것(高)'을 좋아한다. 높은 것을 좋아하면 거만하여 낮추지를 못한다. 그러나 내가 낮추지 못한다는 것은 권세와 부귀만을 믿는 저 사람들에게 낮추지 못한다는 것일 뿐이다. 조금이라도 훌륭한 점이나 선함이 있다면, 비록 노예나 하인일지라도 절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나는 천성이 '깨끗함(潔)'을 좋아한다. 깨끗함을 좋아하면 편협되어 포용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포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권세에 빌붙고 부귀에 아첨하는 저 사람들을 포용하지 못한다는 것일뿐이다. 조금이라도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없다.
남에게 자신을 낮출 수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이 '허(虛)'하고, 그 마음이 '허'하기 때문에 취하는 범위가 넓고, 그 취하는 범위가 넓기 때문에 그 사람은 더욱 높아진다. 그러므로 천하에서 남에게 자신을 잘 낮춘다는 사람이란 본래 천하에서 가장 높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높은 것을 좋아하는 것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이탁오가 스스로 술회한대로 그는 대단히 고결하면서 청렴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도 구차한 절차에 구애받지 않고 간편 실질을 위주로 하였으며, 심지어 불사(佛寺)에서 공무를 처리하는 등 분방하고 무궤도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타고난 분방한 성격과 기존 도덕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학문적 열정 때문에 유교 경학에서부터 역사, 문학, 도학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채롭게 연구하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탁오가 생존했을 때 중국의 학문세계는 여전히 유학의 가치체계가 지배하는 획일주의 사회였다. 그런 사회에서 유학비판은 중세 서양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는 "공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안 된다는 식의 생각"을 비판하면서 "그렇다면 공자 이전의 사람들은 사람 노릇을 못 했을 것인가"라는 반론을 제기한다. 특히 공자상(孔子像)에 대해 "사람들이 공자를 대성(大聖)이라 하므로 나 역시 대성이라 생각한다. 노자와 석가모니를 이단이라 하므로 역시 이단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참으로 대성과 이단을 아는게 아니라 부사(父師)의 가르침을 들은 바에 익숙한 것이고 부사는 참으로 대성과 이단을 아는 것이 아니라 유선(儒先)의 가르침을 듣는 바에 익숙한 것이며, 유선 역시 참으로 대성과 이단을 아는 것이 아니라 공자의 말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도그마에 얽매어 있는 공자와 유학을 비판하고 나섰다.
정통유학에 반하는 모든 학문과 학설은 이단이요 사문난적으로 척결되는 전통유교 사회에서 당돌하게도 공자와 유교에 도전한 것이다. 이같은 행동은 유교의 교리가 남긴 사회의 형식주의와 부패 그리고 회교와 천주교 등 새로운 종교(학문)의 전수를 봉쇄하려는 기득세력의 도전에서 기인한다.
54세가 되던 해 관직을 버리고 운남성 계족산에 들어가 칩거하며 『대장경』을 읽는데 몰두하였다. 이 무렵부터 두루 천하를 주유하면서 벗을 사귀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그야말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그의 인식체계와 함께 행동에 있어서도 파격적이었다. 62세의 장년기를 맞아 머리를 깎고 호북성 지불원(芝佛院)이라는 사찰로 들어갔다. 절에서 살면서 승복으로 바꿔 입고 열띤 강학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지불원에 거처할 무렵 그의 모습은 참으로 기괴했다. 머리는 깎아 삭발했으되 수염은 길게 길렀으며, 옷은 승복을 입고 긴 담뱃대를 물고 다녔다. 기행은 계속되었다. 지불원의 반유반불(半儒半佛)의 생활을 여러 해 동안 하면서 불교철학을 습득한 다음, 만년에는 서양 신부 마테오 리치와 여러 차례 만나 기독교사상에 심취하게 되었다.
도학자들의 비난과 탄핵이 빗발쳤다. 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떠돌이 중(遊僧)을 추방하고 흉악한 절간(浮寺)을 허물어 바른 도(道)를 수호하고 풍속의 교화를 유지하기 위해" 그가 묵고 있던 지불원과 나중에 유골을 안치하려고 만들어 두었던 장골실(藏骨室)을 파괴하였다.
이탁오는 박해를 견디면서 글을 쓰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공의 글은 결코 많지 않았지만, 가슴 속의 독자적 견해를 피력할 때에는 눈부신 빛이 쏟아지는 듯 하며,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시(詩)도 많이 짓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신운(神韻)의 경지가 깃들어 있다. 또한 서예를 즐겨서 매번 먹을 갈고 종이를 펼치면, 옷섶을 풀어헤치고 크게 소리치며, 토끼가 펄쩍 뛰어오르고 매가 세차게 하강하는 듯한 기세로 써내려갔다.
그 중 득의한 작품은 역시 대단히 훌륭했는데, 수축하면서도 기운차고 기세가 넘치고 빼어나서, 만 근의 철완(鐵腕)으로 써낸 듯하며, 날카롭고 거침없는 기골이 종이 위에 거칠고 거세게 펼쳐졌다.(분서)
그는 몇 권의 책을 썼다. 대표작이라 할 『분서』는 '태워 버릴 책'이라는 이름 때문에 과격한 내용으로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가 주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것인데, 치밀한 논리와 차분한 말투에 오히려 압도당할 정도이다. 『장서』는 73세 때 남경에서 간행되었다.'숨겨둬야 마땅할 책'이라는 『장서』와 『설서(說書)』, 『구정이인(九正易因)』등이 있다.
그의 저술에는 가슴 저리는 에피소드가 전한다. 자기의 책이 출간되면 당국에 의해 불태워질 것이라고 예언하여 책 이름을 『분서』라 짓고, 또 책을 저술하더라도 결코 햇빛을 보지 못한 채 매몰될 것이라 하여 『장서』로 이름지었다.
실제로 이 책들은 '분서'가 되고 '장서'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유교적 통치체제를 근본에서부터 뒤흔들게 될 그의 저서가 나오는 속속 불태우거나 땅에 파묻어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을 금지시켰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