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독서'가 뭔지 알아?"
"책 읽는 거"
"오~ 그믄 '토론'도 뭔지 알아?"
"같이 말 허는 거"
"어머니. 우리 이 책 읽엉 '독서토론' 해보카?"
"독서토론?"
내가 어머니에게 독서토론을 제안했던 책은 얼마 전 사서 읽었던 <엄마는 죽을 때 무슨 색 옷을 입고 싶어?>였다. 한 번 읽어봤는데, 기대가 컸던 탓인지 그다지 새롭거나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멀고도 낯선 그 무엇인 것 같으면서도 내 바로 옆자리에 익숙하게 항상 앉아 있는 길동무 같기도 한 이상야릇한 '죽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소화해내고 있는지 궁금한 마음에 책을 들었다. 이미 충분히 무거운 주제를 너무 무겁거나 어둡지 않게 그러나 깊이 있게 건드려 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아주 만족스러운 책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을 도구삼아 어머니와 죽음 이야기를 나눠볼 수는 있겠다 싶었다. 글도 크고 내용도 쉬운 편이라 어머니가 읽기에 별로 힘들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어머니의 눈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해서 지금 안과 검사를 받고 있는 중이라 책읽기는 어쩌다 읽는 정도로 쉬엄쉬엄 진행 중이다.
어머니와 함께 죽음을 이야기하기
예전에 수의를 만들려고 준비해뒀던 삼베가 서랍장에 있던데 수의를 직접 만들고 싶은지. 아들 딸 차별 없이 키웠던 우리 집에서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당연히 아들들이 상주를 하는 것이 나는 이상하던데, 어머니 장례 때는 딸들이 상주를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혹시나 몸이 많이 아플 경우 병원과 집 중 어디에 있다 죽음을 맞으면 좋겠는지... 간간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는 한다. 신앙의 힘과 타고난 성정 덕분에 어머니는 죽음의 공포가 크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더더욱 편하게 죽음이라는 주제를 같이 나누면서 어머니의 바람과 숨결이 담긴 죽음의 과정을 함께 만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제주에서의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면서 두어 달 전부터는 가끔씩 마을 도서관을 다니고 있다. 내가 볼 책도 빌리고, 어머니가 편하고 재밌게 볼 수 있을 듯한 그림책, 동화책 등도 빌리곤 한다.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예전보다 더 자주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은 나의 대출도서 목록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었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요즘에 다시 빌려 보고 있는 중이다. 루게릭 말기 시한부 환자임을 선고받은 모리 교수. 이 책은 모리가 자신의 옛 제자와 화요일마다 만나 삶과 죽음에 대해 나눴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죽음이 코앞에 닥쳤다는 충격적 사실 앞에서 모리는 자신의 죽음을 인생 최후의 프로젝트로 삼고,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승화시키기로 다짐한다. 방송 출연, 미치 앨봄과의 화요 토론, 그리고 행사의 주인공이 기획하고 참여하는 '생전의 장례식' 등이 구체적으로 그가 진행했던 프로젝트들이었다. 그는 '죽어간다'라는 단어가 '쓸모없다'라는 단어와 결코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는 또한 죽어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곧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죽음을 화제로 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를 피하는 우리 사회의 문화는 삶의 핵심을 피하는 것과도 연결되는 것일까? 아마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삶과 죽음, 내 어머니의 삶과 죽음 등을 떠올려보며, 나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다'는 감각으로 충만한 순간들을 종종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대단한 그 무엇이 아니라, 서로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맛있는 것을 함께 나누는 밥상, 수다와 웃음 등 소소한 일상의 시간들 속에서 피어나는 찰나 같은 것이리라. 내 옆에서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존재가 있다는 느낌, 그것이 우리의 '살아있음'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가장 원초적인 감각이 아닐까 싶다.
죽음의 순간에도 그런 느낌을 가지며 죽어갈 수 있다면, 그 죽음은 아마도 '섭리'에 따른 행복한 죽음일 수 있을 것 같다. 당연하게도 죽음의 순간까지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충분히 존중받으며 죽음의 순간을 향해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죽음이라 하더라도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버거운 것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 버거움을 감당해내기 위해 서로를 보듬으며 애쓰는 것이 아마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리라. 하지만, 초고속 발전을 이룬 우리 사회는 그런 죽음의 능력을 점점 상실하면서 질주해온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어머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
섭리에 따른 좋은 죽음을 생각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내가 아는 억울한 죽음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7년이 지난 세월호 참사, 법이 개정되면서 TV에서 자주 다뤄지고 있는 4·3항쟁, 4·19, 5·18, 그리고 현재진행중인 미얀마에서의 살육 등 참혹하고 억울한 죽음들 앞에서 먹먹하다.
당사자들은 그리고 그 유족들은 어떤 세월을 감당해왔을까? 사실이 밝혀진다 한들 그 죽음의 억울함과 비통함을 지울 수는 없겠지만, 살아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실체적 진실들을 밝혀내는 데 각자의 작은 힘을 보태는 일일 것이다.
제 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모리의 방에 신문 더미가 쌓여 있는 것을 보며, 미치 앨봄은 요즘도 뉴스에 관심이 있냐고 질문한다. 이에 대해 모리는 죽어가기 때문에 세상일에 무관심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지 반문한다.
그리고는 병으로 고생하면서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더 가깝게 느껴진다고, TV에서 보스니아인들이 길거리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는 광경을 보고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눈물이 흘렀다고 말한다. 자신의 죽음이라는 커다란 고통 앞에서 무너지거나 갇혀버리는 대신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어머니와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해서 5개월이 넘어가는 지금, 내 삶에서의 큰 변화라면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해서 우리네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의 습관이 생겼다는 점인 것 같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연민과 사랑 그리고 혐오와 배타, 늙고 약한 몸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약한 자들을 취급하는 우리들의 태도와 능력, 개인의 고유성을 거의 잃은 채 치러지는 매일의 획일적인 장례식들... 내 몸의 존재근원인 어머니는 이제 와서는 내가 삶을 바라보는 창의 역할 또한 하게 되었다.
조만간 같이 할 우리들의 독서토론에서는 어떤 이야기들이 오갈까 궁금하다. 어머니는 읽는 대로 다 잊어먹고 있다며, 지금 그 책을 반 조금 넘게 읽었다. 원하는 속도로 원하는 만큼 읽고 나서 토론을 해보려 한다.
원래 세미나를 할 때 보면, 책을 다 읽은 사람보다 안 읽은 사람들이 더 많은 법. 억지로 다 읽기를 바랄 건 없고, 적절한 시간에 죽음 수다의 장을 열어보려 한다. 맛난 것 앞에다 차려놓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