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엉덩이가 들썩인다. 누군가의 장점을 잘 발견하며 그걸 빨리 말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라는 말을 달고 살지만 그 기분이 싫지 않다. 사실은 슬플 일도, 기운 빠지는 일도 어퍼컷 날라오듯 난데없이 들이닥치지만, 동시에 또 시시한 일상에 헤헤거리기 일쑤다. 이런 하루도 저런 하루도 시시껄렁한 기록으로 남겨본다. 그러니까 어쨌든 존재하고 있으므로. 그것으로 충분하므로.[기자말] |
"선생님 정체가 뭐예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학교의 부장 선생님께서 우연히 내가 쓴 오마이뉴스 기사를 읽고 동료 교사들에게 링크와 함께 소식을 알린 것이다. 기사를 읽은 선생님 중 한 분이 나에게 정체를 물어왔다. 잘 봤다는 소복한 응원과 함께.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력이 좀 독특하다. 상고를 나와 이십 대에 돈을 벌었고, 삼십 대에 사범대를 다녔으며, 오랜 임용고시 낙방 끝에 뒤늦게 교사가 되었다. 마흔에 첫 아이를 출산해 긴 육아휴직 후 올해 학교에 복직했으니 이건 그냥 나이만 많은, 아무것도 모르는 신출내기 교사인 것이다. 거기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란다. 정체가 무언가 궁금할 법하다.
내 정체가 교무실에 알려지던 날, 그날은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폐기물이 나오지 않는 것) 커밍아웃의 날이었다. <
나는 세탁기 없이 산다 아주 잘>(http://omn.kr/1sru7)이라는 내 기사를 읽고 몇 명의 선생님들이 와서 말을 건넨다.
"쌤, 저도 일회용 플라스틱, 비닐 안 쓰려고 신경 쓰고 있어요."
"쌤, 나도 제로 웨이스트 관심 많은데…"
"쌤, 나 머리 비누로 감아요. 그래서 내 머리가 이렇게 수세미였잖아."
우와! 또 신이나 목소리가 커진다. 유려하지 못한 글솜씨를 동료들에게 들켰다는 부끄러움은 찰나다. 그저 신이 난다. '그래, 사람들이 다 이렇게 자신의 깜냥으로 묵묵히 지구를 되살리고 있었어'라는 생각이 드니 만주 벌판 어디쯤에서 비밀 요원을 만난 독립운동가가 된 기분이다.
내 깜냥으로 내 삶에 정착한 제로 웨이스트는 ▲ 주방세제, 샴푸, 바디워시 등을 모두 비누로 바꾸고 ▲ 육아의 필수품이 되어버린 물티슈를 진작부터 안 쓴 것이다.
33개월 아기를 키우는 엄마로서 물티슈의 긴요함을 모르는 바 아니나 걸레나 손수건을 몇 번 더 빨면 될 뿐 생각보다 물티슈 없는 일상이 불편하지 않았다. ▲ 정육점에서 고기를 살 때 미리 준비한 반찬통 들이밀기 ▲ 마트에서 비닐 대신 가져간 면주머니를 사용하기 ▲ 미세플라스틱의 주범인 나일론과 폴리에스터 등 합성섬유로 만든 옷 되도록 안 사기 등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는 참이다.
사실 요즘 나는 정체기를 겪고 있었다. 텀블러를 깜빡 잊고 외출한 날에는 일회용 컵에 커피를 사 마시기도 하고 퇴근 후 배달 음식도 자주 시켰다. 집에서 퇴출한 물티슈를 학교에서는 종종 사용했다. 가장 지지부진한 일은 육식 지양 식습관을 들이는 것인데 잘 안 되고 있다. 좀 피곤한 날엔 지글지글 삼겹살이 그렇게 먹고 싶다.
그런데도 가진 깜냥으로 만만하게 할 수 있는 뭔가를 찾고 싶었다. 이제는 커밍아웃한 비밀 요원들도 도처에 있지 않은가. 다시 제로 웨이스트에 박차를 가해 보자!
사라지는 열대우림... 그래 끊자
커피는 세계적으로 하루에 25억 잔씩 소비된다. 이 엄청난 수요를 맞추기 위해 커피가 자라는 적도 주변 열대 우림은 계속해서 커피 농장으로 바뀌고 있다. 세계 열대림의 절반 정도가 이미 사라졌고 지금도 매년 한반도 면적 크기의 열대 우림이 사라지고 있다. (중략) 공우석 교수는 모든 개개인이 일상의 편리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말한다.
- <줄이는 삶을 시작했습니다>에서
<줄이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이 책에 인터뷰이로 등장하는 공우석 교수(경희대 지리학과 교수)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지구를 위해 커피를 끊는 일. 이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커피가 몸에 잘 맞지 않아 신경 써서 마셔야 한다. 오후에 마시면 밤에 잠을 못 자고, 빈속에 마시면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이것들을 무시하고 계속 마시면 두통이 온다. 그런데도 나는 왜 계속 커피를 먹고 있는가? 커피를 핑계로 사람들과 대화하길 좋아했다. 또 왠지 커피를 마시면 일이나 공부의 효율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과 대화할 때 연근차를 마셔도 될 일이며 공부나 일의 효율은 음... 그냥 몰두하는 것으로 대체해 보기로 하자. 지구를 위해서, 내 아이의 안온한 미래를 위해서. 자연 가까이 살고 싶은 나를 위해서.
학교에서 나는 중책을 맡고 있다. 이름하여 '원두 부장' 되시겠다. 커피 드시는 선생님들끼리 돈을 모아 원두 사서 휴게실에 있는 커피기계에 채워 넣는 일이다. 커피 한 잔 뽑으러 가서 마주친 선생님들과 하하 호호 이야기 나누고, 또 복사기를 고치러 오신 기사님께도 원두 부장의 권한으로 커피 한 잔 대접하기도 한다.
이런 일상이 참 즐겁다. 이제는 커피 안 마시는 원두 부장으로 이 즐거움은 계속 움켜쥔 채 지구도 살려보기로 한다. 일단은 내가 매일 한 잔씩 마시는 양만큼 커피 소비가 줄지 않았나. 열대 우림의 경이를 단 하루라도 더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상고를 나왔다. 이십 대에 돈 벌고, 삼십 대엔 대학생이었으며, 사십에 교사와 엄마가 되었다. 매일 제자들과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준다. 육아휴직 중인 44세 남편과 가정 보육 중인 4세 아들의 성장기가 뭉클해 수시로 호들갑을 떤다. 가까운 미래에 내가 졸업한 상고에 부임하여 후배이자 제자들과 그림책으로 수업하는 꿈을 꾸는 시골 교사 홍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