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시절 그의 행보는 대단히 파격적이었다.
관립한어학교에 들어간 것,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참여 등이 그러하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만민공동회 활동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나서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22세가 되는 1900년 9월이다.
육군무관학교는 1896년(건양원년) 정월에 그 관제가 반포되어 설치되었다. 이때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의 간섭이 심할 때였으므로 러시아식 군제가 도입되어 초급장교 교육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학교는 1897년 10월 경에는 그 교육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 후 군사력 증강에 의한 자강에의 요구가 국내에서 일어나게 되자 1898년 5월에 칙령으로 제2차 개교를 준비하게 된다.
즉 독립협회에서는 『독립신문』을 통하여 자강국방론을 주장하고 있었고, 내각에서도 기존의 군제에 대한 비판과 병권(兵權) 확립의 요구가 높게 되는 등 자국 국방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었다.
따라서 광무 2년 4월에 내각에서 무관학교 설립을 주청하게 되었고, 광무제에 의해 그해 5월에 무관학교 설립의 칙령이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2차 개교는(…)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이 서로 상치되어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비교적 외국의 간섭이 없이 자주적인 무관학교 설립 및 운영이 가능했었다고 한다. 즉 1900년 9월 개교로부터 약 4년 간을 무관학교의 제도가 완비되고 실질적으로 잘 운영되었으며, 한인교관(韓人敎官)에 의하여 교육이 실시되었던 시기였다고 평가하였다. (주석 1)
신규식이 오랜 문관 벼슬의 가문 출신으로서 무관학교에 들어간 것은 보통 파격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의 패배, 명성황후 살해, 서구열강의 이권침탈, 일본세력의 국정 깊숙이 개입,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처절한 좌절 등을 지켜보면서 힘(군사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내린 결단이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옹골찼다. 불의를 보고는 그냥 지나치려 하지 않았다. 15세에 동년군을 조직하고, 18세에는 만민공동회에서 근대적 지식인의 비판정신을 갖추었다. 그리고 20대 초에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큰 포부를 펴고자 시도했다.
정부는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신식군대의 지휘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육군무관학교를 세우고 엄격한 절차와 까다로운 선발과정을 거쳐 200여 명을 선발하였다.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뽑힌 사람 대부분이 칙임관 이상의 자제이거나 그들 친인척인 것이라 하여 특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규식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알려진 우수한 두뇌와 건장한 신체 그리고 그동안 겪은 애국계몽운동 단체에서 훈련되어 입학시험에서 당당히 합격하였다.
신규식은 무관학교에서 전술학ㆍ군제학ㆍ병기학 등의 군사학과 함께 외국어 등도 교육받았다. 이미 사상을 전환하여 한어학교를 수학하고 만민공동회에 참가했던 그였으므로 무관학교 수학기간은 개화의 심화와 그를 토대로 구체적인 구국운동의 실천을 꾀하던 시기였다. 그는 무관학교 재학중에 군제개혁을 요구하는 동맹휴학을 시도하다가 체포되는 등 개혁을 추구하였고, 후술하지만 향리에 신교육학교를 세워 문중개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예관이 개화청년으로서의 입지가 굳어져 있던 단면으로 이해되며, 또한 동료사회에서 지도적 위치로 부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예관은 1902년 7월에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참위로 임관했으며 그 후 견습을 마치고 1903년 7월에 정식으로 무관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주석 2)
그가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참위로 임관하기까지는 순탄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에 의형제를 맺고 향후 함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게 되는 동지 조성환(曺成煥)을 만나게 되었다. 이 학교 역시 각종 한말 조정의 부패상 그대로 비리가 만연하였다. 정의감이 강했던 그로서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모든 학과 성적에 뛰어났던 선생이었지만, 학교 당국의 부패와 여러 가지 불합리한 처사를 공격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는 개혁을 하실 생각으로 파과운동(罷課運動:수업거부)을 일으킬 계획을 하셨다. 원래 군관학교에서는 모든 사건의 주동 학생은 일률적으로 군법에 의해 처리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요행히도 일대 파과운동을 일으켰을 때 선생께서는 마침 신병으로 고향에 돌아가 병석에 누워계셨던 관계로 처분을 모면했다. 그 후 특사가 내려서 처분을 받았던 동학들도 다시 수학하게 되었으며, 선생께서도 역시 무사히 그 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군계에 복무하여 보병영(步兵營)에서 직무를 맡아 보셨다. (주석 3)
그는 1902년 7월 6일 육군보병 참위에 임명되고 1903년 3월 22일 진위대 제4연대에서 견습을 받고 그해 7월 3일 졸업증서가 수여되었다. 대한제국의 군인, 장교가 된 것이다.
예관은 육군무관학교에서 지낸 3년 동안 무관이 갖추어야 할 엄격함과 굳센 기질을 몸에 익힌 덕분에 일평생 몸가짐이 시종 군인의 규율과 단정함을 간직하고 지킴으로써 장엄한 기상을 풍기게 하였다. 그야말로 문ㆍ무를 겸비하고 근대화에의 열정이 강렬한 청년으로 변모한 예관은 육군무관학교 졸업 후 육군 참위로 진위대와 시위대 및 모교인 육군무관학교에서의 견습과정을 마친 뒤 시위대 제3대대에 배속되고 6품으로 승급되었다. (주석 4)
주석
1> 임재찬, 「구한말 육군무관학교에 대하여」, 『경북사학』4, 경북대학사학과, 1982, 여기서는 임춘수, 앞의 책, 469~470쪽, 재인용.
2> 임춘수, 앞의 책, 470쪽.
3> 민필호, 앞의 책, 303~304쪽.
4> 강영심, 앞의 책, 3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